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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예 Apr 21. 2020

6. 제임스 본드 혹은 한니발 렉터 식으로 관찰하기-2

제임스 본드 혹은 한니발 렉터 식으로 관찰하기


나는 영화광이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조울증 환자들이 조증 상태에 있을 때 특정 활동에만 끊임 없이 몰두하는 경우가 있는데 - 대부분 이런 경우에는 파괴적인 활동, 예를 들면 위험한 섹스나 도박 같은 것일수도 있겠지만, 아주 유명한 조울증 환자 중 한 명인 헤밍웨이는 조증일 때 3일만에 글을 완성하고는 했다 - 마치 그런 조증 상태처럼, 나는 영화를 보지 않으면 굶어 죽기라도 할듯이 하루 종일 연이어 10편 가까이 되는 영화들을 보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나면 여러 영화들이 주는 미쟝센과 감상들이 한 데 뒤엉켜서 밤이 되면 아주 독특한 꿈을 꿨다. 그 후에는 나는 영화들이 남긴 잔상과 감정의 쓰나미 속에서 몇 달을 살면서, 한 동안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영화에 대하여 폭식과 절식을 반복하는 식이장애 비스무리한 것을 갖고 있다.


인턴이 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영화를 볼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나면 새벽녘에 숙소에 도착해서 쓰러지듯 잠이 들었고, 오프 때는 집에서 밀린 잠을 자느라 도무지 다른 무언가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과 인턴이던 어느 초겨울 날에, 유튜브에서 007 카지노 로얄의 클립을 보게 되었다. 그 클립은 도박장에서 다니엘 크레이그와 매즈 미켈슨이 겨루던 장면이었다. 이 클립을 보자마자 나는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겠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007 카지노 로얄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였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처음으로 '뻔하지 않은' 본드걸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부분은 다니엘 크레이그와 에바 그린이 처음 만나는 기차 장면이다.




여기서 둘은 서로의 생김새나 억양, 옷차림, 차고 있는 시계를 바탕으로 어린 시절까지 추적해낸다. 둘은 마치 경쟁하는 듯 보이고, 자신의 치부까지 들켜 나가는 것에 불쾌해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침내 이런 나의 추악함까지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끌린다. 마음 속에 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나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아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 자신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주기를 바라는 법이다.


이 장면을 보면 연상되는 다른 영화가 있다.


양들의 침묵이다. 조디 포스터와 극중 한니발 렉터로 분한 앤서니 홉킨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은 상당히 흥미롭다. 분석해야 할 사람은 분석 당하고, 파헤쳐져야 하는 사람은 파헤친다. 조디 포스터는 자신의 체취나 말투, 옷차림을 통해서 자신을 꿰뚫어보는 앤서니 홉킨스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궁금증을 갖는다.


둘은 정신과 의사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 정신과에서는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묻고, 분석한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탐색 exploration'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정글 탐사를 하듯이, 한 사람이 살아온 자취에 대해서 탐험을 하듯, 진귀한 생물이나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샅샅이 조사하듯, 그렇게 사람을 본다.


다른 점이라면, 정신과 의사는 결코 공격적이거나 취조하듯이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 아주 사사로운 것까지 묻는 것은 타인의 인생을 관음하고 싶거나 비밀을 수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 사람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진료 시간에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결코 진료실 안에서는 울지 않겠지만, 그 날 밤 침대에 누워 그와 그녀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제임스 본드 혹은 한니발 렉터 식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오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사실 일상에서는 굉장히 무례한 일이다. 그러나 나와 가까운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는 꽤나 유용하다. 나는 (끔찍하고 악랄하게도) 주로 연인들에게 이런 식으로 관찰하는 법을 써 왔다. 그가 말하는 법,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옷은 어떻게 입는지, 평소 습관이 어떤지. 당연히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빗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연애에서 숱한 실패들을 겪었고.


또 하나, 이런 관찰법은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에도 도움을 준다. '내가 도대체 어쩌다가 이따위 인간이 되었나?'라는 생각을 나는 꽤나 자주 했다. 특히 인턴 시절에 아주 많은 크고 작은 실수들을 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을 때마다 지독한 자기혐오를 겪으면서 수도 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나는 왜 이렇게 컸지?'


그럴 때 다시 한 번 돌아본다. 내가 지금 쓰는 말투, 어떤 외형을 좋아하는지,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되었는지.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분석하면, 인정하기 싫은 아주 치졸하고 추악한 것들까지도 드러날 때가 있다. 놀라운 점은, 내가 그런 부분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런 것들까지도 품을 수 있는 준비가 된다는 점이다.


하얗고 미끌미끌한 남자를 관찰하게 된 계기


하얗고 미끌미끌한 남자.(전편을 참조) 그와 나는 연인은 아니었다. 연인이라기에는 서로간에 신뢰가 너무 부족했다. 이건 그가 내게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어느 날 그와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문득 이렇게 말했다.


"너와 나 사이에는 너무 신뢰가 부족한 것 같아."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고작 24살 언저리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폴리클(의대 학생 실습) 때였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훌쩍 많고, 거대하고, 무수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그에게 압도되어 있었다. 내가 그 때 주로 했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도대체 30대 남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그는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내게 하루 종일 연락을 해오지도 않았고, 내 사진을 보내달라며 떼 쓰지도 않았고, 절절한 손편지를 보내오지도 않았다. 그저 갑자기 오프라며 내 눈 앞에 나타나 선물을 툭 던지고는, 써라, 이렇게 말하고 밥을 먹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나를 갖고 논다고 굳게 믿었다. 나는 그에게 절대로 절대로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그가 아무리 내게 달콤한 말을 해도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라며 나 자신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이미 나는 그에게 빠져 있었음을, 사실 나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앞에서 그에게 반하지 않은 척을 했다.


그는 대학병원 전공의였는데,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와 나는 같은 학교 출신이기는 했으나 나이 차이도 많이 났기에 접점이 없었고, 그의 여성편력에 대한 온갖 소문들을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를 실제로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나는 아주 우연한 기회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병원에서 그가 근무하던 과에서 학생 실습을 돌았다. 실제로 그와 내가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은 단 이틀 정도 뿐이었는데, 그가 순환 근무를 하게 되어 지방 분원으로 파견을 갔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처음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와, 진짜 의사같이 안 생겼다.'


그가 파견을 간 지 일주일 뒤에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실습을 잘 돌고 있냐는 안부 문자같은 것이었는데, 나는 조금 당황스럽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런 연락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를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 기분이 좋았다.


몇 번의 카톡을 주거니 받거니 한 뒤에 나는 그와 사복을 입고 만나게 되었다. 때는 아직 추워서, 그는 검은색 니트에 검은색 코트를 입고, 빨간색과 검은색이 교차된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깔끔한 차림이었다. 나는 짧은 검은 치마에 검은 스타킹을 신고 7cm짜리 하이힐을 신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너무 오바한 것이 아닌가 하고 부끄러워졌다.


그와 나는 병원에 대한 아주 무미건조한 이야기 - 주로 교수님들에 대한 험담- 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특이했던 점이라면, 그가 헤어지기 전 내게 자신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그는 한 동안 연락이 없었다.


나는 이미 그가 좋아졌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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