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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 톨스토이

by Renaissance

[안나 까레리나]를 무척 재밌게 읽었지만 방대한 양에 손이 가지 않아 미루던 [전쟁과 평화]를 결국 다 읽게 되었다. 역시나 대서사시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1권을 다 읽은 후 2권을 읽을 때에도 이 사람이 누구였나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뇌의 신비함 덕인지 작가의 위대함인지 2권 중반부터는 모든 인물이 머릿속에 저장되고, 그 후부터는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지 않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2권 중반까지가 1000페이지 가깝게 된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거장의 대하소설은 1800년대 초에 벌어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전 후 러시아 각계 각층의 얘기를 총망라하였다. 나라가 없어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러시아 귀족 계급의 이기심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국가의 안위보다 자신의 계급과 재산이 더 중요하고, 정치역학을 계산하여 황제에게 아첨하는 모습들. 거장은 명예훼손 따위 신경쓰지 않고 실제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귀족들을 신랄하게 깐다. 실제와 가상이 혼재된 팩션 소설은 실제 역사를 톨스토이의 시각으로 풀이한 전쟁 부분과, 가상의 캐릭터들로 이루어진 드라마 부분이 나뉘어 있다. 제목이 전쟁 과 평화 로 나뉜 것 처럼 실제 와 가상 이 섞여있는 구성이다. 드라마 부분에 더 많으 부분을 할애해도 좋으련만,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감정이입 한 캐릭터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거장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량을 전쟁 쪽에 할애한다. 그래서 드라마 부분이 나올때까지 꾹 참고 전쟁 부분을 읽어야 한다. 드라마 부분이 전쟁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고, 무엇을 은유하는지 명확한 캐릭터들이 나오기 때문에 드라마 부분만으로 충분히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되지만, 사실 톨스토이가 쓰고 싶었던 건 전쟁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명백해보이는 이유는 이 책의 에필로그다.


모든 소설이 끝나고도 이 책은 200페이지가 남는다. 그 200페이지는 바로 에필로그다. 에필로그엔 전쟁도 드라마도 나오지 않는다. 철학으로 채워진 마지막 200페이지는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은 정수다. 전쟁은 역사가가 기록한 것과 다르게 어떤 한 사람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거대한 흐름에 가깝다고. 전쟁의 발발도 그렇고, 전투도 그렇고, 수습 과정도 결국 거대한 흐름때문에 벌어지는 거라고. 나폴레옹이 원하지 않았어도 러시아 원정은 벌어졌을 거고, 알렉산드르 1세가 원하지 않았어도 러시아는 서방으로 진격했을 거라고.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의지는 허상이라는 결론을 철학 논문 200페이지로 서술한다. 내 해석을 방해하는 해설서가 책 뒤에 붙는 것을 혐오하는 사람이라 작가의 말조차 읽지 않는 사람에게 그 에필로그는 너무나 사족처럼 느껴졌다. 따로 철학 논문으로 발표해야할 내용을 왜 굳이 전쟁과 평화라는 대하소설의 에필로그로 넣었을까. 이미 2000페이지를 읽으며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이해했는데, 톨스토이는 그걸로 부족했나 보다. 그는 애초에 이 에필로그를 위해 소설을 쓴 것일테다.


공교롭게도 모스크바를 프랑스에게 뺏긴 후반부에 한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나는 뉴스를 보느라 소설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다시 집중하고 읽는데, 모스크바를 뺏긴 책임을 물어 총사령관을 매도하고 자기 이득을 챙기려는 귀족들의 모습이 소설에 등장하자 분노로 전자책을 던질뻔 했다. 내가 방금 뉴스에서 읽었던 인간 군상이 소설에 그대로 나타나 있어서다. 국회에 군대를 보내 국회의원을 체포하려던 것을 내란이 아니라고 우긴다던가, 다음 대선 유불리를 따지면서 계엄을 선포한 내란수괴를 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자리에 그대로 두자는 인간들. 주변 사람도 분통을 터지게 만들었는데, 트럼프 지지자들이 총을 들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했을 당시에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란군이라고 흥분했던 양반이 계엄이 뭐 어떻댜는 반응을 보여 차단해버렸다.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상대방의 의견을 잘 들어주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의 의견을 듣기를 좋아하고, 나는 논리적 모순점이나 의구심을 곧바로 되묻는 성향이다. 끊임없이 정반합을 이루는 대화를 좋아하는데 상대방이 말을 돌리거나,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면 나는 집요하게 묻는다. 거기에 대한 대답을 듣지 않으면 나는 대화가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들어주는 기계가 아니다. 이런 나의 성향을 알면서도 나에게 말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째, 나의 이런 대화 방식을 존중하고 본인도 즐기는 사람. 둘째, 대화하는 모든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기계라고 생각하는 사람. 애석하게도 나에겐 아직 두번째 부류의 주변인들이 남아있다. 인간관계가 많이도 정리 되었는데, 아직도 남아있는거보면, 내가 뭔가를 잘못했거나, 그들이 정말 특이한 사람들일 테지. 나는 최대한 연락을 피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나의 대화 스타일에 짜증을 내기도 하고 본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본색이 꽤나 충격적일 때가 있다. 계엄이 뭐 어떻느냐니. 그는 내 20년지기 친구였다. 이젠 아니지만.


영화가 너무 설명적이거나, 감독이 너무 대놓고 의도를 드러내면 짜치다고 생각한다. 크게 성공한 영화를 만든 감독의 차기작이 그런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런 설명적인 영화조차도 멋지게 만드는 거장들도 존재하지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안나 까레리나라는 불후의 명작을 만든 후에 써서 그런지, 감독이 대놓고 의도를 드러낸 설명적인 영화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명작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럽다. 나도 소설을 잘 쓰면 얼마나 좋을까. 투자를 기다릴 필요 없이, 나 혼자 쓸 수 있는 예술. 정말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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