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때처럼 에어컨을 틀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추워서 에어컨을 껐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또 지나가는구나 생각면서 잠에 들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잠을 설쳤는지 허리가 아팠다. 운동해서 아픈게 아니라 그냥 잠을 잘 못자서 아프다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누군가의 돌잔치에 가야하는 날이다.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넥타이를 골랐다.
누군가의 돌잔치에 간 건 처음이었다. 비혼주의자라 결혼식도 안 다니는 판에 돌잔치 초대가 오면 어이가 없었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것임에도 너를 축하해주기 위해 결혼식에 가주었는데 돌잔치까지 오라는 건 좀 선을 넘은 것 아닌가. 이번엔 일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은 분이라 당연히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첫번째 돌잔치를 경험했다.
모두가 새로 태어난 아이가 첫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광경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아이의 손짓, 발짓, 옹알이 하나하나에 하객의 탄성이 터졌다. 누군가가 이토록 많은 집중을 받고 조건없는 사랑을 받는 광경을 너무 오랜만에 보았다. 마지막으로 콘서트에 간 적이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오지오스본 내한 공연이었던 것 같다. 아이는 태어난 것 만으로, 1년을 건강하게 살아남은 것 만으로 전 지구적 스타에 버금가는 사랑을 받았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을 것이다. 누구나 거쳐야 하는 사춘기를 거치고, 누구나 겪어야 하는 입시를 치르고, 대학을 졸업한 후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할 것이다. 건강하게만 자라주라는 덕담속에 첫 돌을 맞이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과 전혀 상관없는 요구들에 괴로워할 것이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살 수 없는건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그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인생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동료 감독님들과 같이 차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로 부모님 얘기가 나왔다. 장편에 입봉하여 다음 작품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와 동료 감독들은 여전히 부모님으로부터 언제 영화를 그만둘 것이냐는 압박을 받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말을 부모님의 투정으로 넘기겠지만, 현재는 그럴 수가 없다. 영화시장은 망했고, 우리는 그만두기 싫어서 떼를 쓰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제작비가 많이 드는 영화 중 한 편을 찍은 감독 중에 한 분이 아직도 부모님으로부터 다음 영화는 찍기는 하는 거냐며 구박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 우린 평생 부모님으로부터 영화감독으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며 웃었다. 우리 중 돌잡이때 무엇을 잡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투배사는 서슬퍼런 구조조정과 조직개편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한번 구조조정에 들어간다고 한다. 롯데와 메가박스는 합병을 준비하기 위해 구조조정 중이다. 진행되고 있는 영화가 없으니 영화사업부의 모든 사람이 놀고 있는 인력이다. 사람을 내보낸다는 건, 새로운 영화를 더이상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나는 영화를 그만두면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한지 이 년이 되어가고, 동료 감독들은 그런 나를 말리며 단편을 찍게 했으니 나만 고민이 많은 줄 알았다. 돌아오는 길에 이야기를 나눠보니 동료 감독들도 사실 나못지 않게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도 그만둬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동료가 그만두겠다고 하니, 마치 그것을 시작으로 모두가 그만두게 될까봐 나를 붙잡은 거였구나.
내년이 두렵다. 올해가 가기 전에 고민을 끝내고 싶은데 벌써 9월이 되었다. 이제 추석이 되면 건강하게 잘 자란 나는 부모님을 뵙고 어떻게 밥벌어 먹고 살지에 대해 대답을 해야한다. 베필을 만나 손주 돌잔치를 방대하게 열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투정을 들어야 한다. 누군가는 돌잔치를 맞이할때 누군가는 죽어간다. 그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냐고 느끼는 순간마다 나는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내게 몇번의 여름이 남았을까. 몇 번을 더 아쉬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여름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