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감독을 존경한다. 데뷔작 [우리들]부터 명작을 만들어 베를린에 가셨고 후속작 [우리집]도 대작을 뽑아내셨다. 단 두편만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녀도 한국 영화계의 피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하기야, 이창동 감독님도 투자가 안돼 넷플릭스로 가시는 판이니 별 수 있나. 그리하여 영진위 제작지원, 서울영상위 제작지원, 경기도영상위 제작지원 등 받을 수 있는 공공 자금을 모두 끌어다 [세계의 주인]을 만들었다. 윤가은 감독의 프로젝트니까 그럴만 하다. 하지만 거기엔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거기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세계의 주인]은 위대한 영화다. 나같은 미천한 인간이 리뷰할 필요가 없다. 나는 윤가은 감독이 공공자금으로 영화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작금의 현실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 한다. 그 정도 위치의 감독이 투자사로부터 자금을 받지 못해 공공자금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현실. 윤가은 감독같은 사람이 공공자금을 투자받으면 그 만큼 다른 신인에게 기회가 가지 않는다. 영진위는 제작지원을 하면서 프로젝트별로 차등 지원을 한다. 최대 지원금액을 잘 주지 않는다. 최대한 많은 프로젝트에 예산을 분배하기 위함인데, 윤가은 감독은 영진위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최고 액수를 지원받았다. 2024년도에 최고 액수를 지원받은 유일한 영화다. 그말인 즉슨 그만큼 다른 프로젝트들은 돈을 못 받았다는 소리다. 올해는 더 심했다. 올해 영진위 제작지원 최고 지원 작품은 이창동 감독님 프로젝트였다. 그럼에도 제작비기 부족해 그 돈을 토해내고 넷플릭스로 갔다. 토해냈다고 해서 그 자금이 다른 프로젝트로 갔을까? 그럴리가. 올해 지원받은 다른 작품들도 감독 이름이 쟁쟁하다. 기성 감독들이 이렇게 지원을 쓸어가면 그만큼 신인감독은 지원을 못 받는다. 그래도 [세계의 주인]같은 작품은 보고싶으니까 참아야 하는걸까. 아니면 또다른 [우리들]같은 작품을 위해 이름 있는 감독들은 양보를 해야하는 걸까. 이 조그마한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쟁쟁한 감독들이 영진위라는 케익으로 달려드는 이 현실이 참으로 거지같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과 [우리집]은 마치 연작처럼 초등학생의 이야기와 중학생의 이야기였다. 아이들의 결핍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거장답게 아주 깊은 시각으로 풀어냈다. [세계의 주인]은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라 연장선에 있는 것 같지만 주제가 달라졌다. 이번 작품의 소재는 성폭행이다. 공공자금이 투입된 독립영화에서 이제 성폭행이 아닌 소재를 찾기가 더 힘들 지경이다. 이런 경향성은 특히 영진위 지원 작품에서 두드러지는데, 이 정도 되면 영진위 제작지원을 받기 위해 성폭행 소재에 대해 쓰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가는게 당연지사다. 영진위는 심사위원 풀을 매번 다르게 한다는데 어쩜 이렇게 뽑히는 작품들은 소재가 비슷한지 보이지 않는 알력이 존재하거나 아니면 심사위원 풀이 다 고만고만한 하거나 가 아닐까. 2021년 문재인 정부때 생긴 성평등 가산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살아남았다. 이름은 성평등 가산점이지만 여성 가산점이다. 감독, 프로듀서, 작가, 촬영감독 이 여성이면 1점씩 준다. 그리고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여성이면 1점을 줘서 총 5점의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이 정책을 아직도 유지하는거 보면 영진위는 소재의 다양성에 별 관심이 없어보이긴 한다.
하나의 주제를 계속 파고드는 작가주의 감독들이야 소재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는게 우스운 일이다. 션 베이커 감독보고 직업 여성 얘기 그만 하라고 할 사람이 있을까. 김미조 감독은 데뷔작 [갈매기]에서 중년의 성폭행 피해여성에 대해 다뤘고, 아직 개봉은 안 했지만 영화제 출품 중인 [경주기행]은 성폭행 피해여성 가족의 복수 이야기라고 한다. 김미조 감독에게 다른 소재의 영화를 기대하는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윤가은 감독은 결핍과 가족과 성장에 대해 다루는 작가주의 감독 아니었나. 제작지원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소재를 정하는데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자체가 역겹다. 나도 이런 생각 안 하고 싶다. [우리집]의 경우 롯데가 투자해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더 든다. 계속 롯데나 씨제이처럼 메이저 배급사의 투자를 받았을 경우 원래 자신이 천착했던 주제로 영화를 계속 만들지 않았을까. 영진위 제작지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방향을 튼 건 아니었을까.
[세게의 주인]은 위대한 영화다. 독립영화라 극장 개봉관이 몇개 없으나 벌써 3만 관객을 넘었다고 한다. 쾌거다. 그만큼 영화가 좋다. 극장에서 꼭 보시기 바란다. 이 글은 앞으로 볼 수 있는 한국영화가 독립영화밖에 없을텐데, 소재라도 좀 다양했으면 하는 바람에 안타까운 마음을 배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