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살아가는 법

by Renaissance

내년엔 상영할 한국 영화가 없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뭐라 썼는지 보려고 읽은 거지만, 정작 놀라운 건 댓글의 반응이었다. 영화산업이 없어진다고 해서 한국 국민이 먹고사는 데에 문제가 생기냐는 댓글.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다는데 인식은 여전히 개발도상국이구나. 인식의 수준이 먹고사는 것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 선진국인 것을. K팝은 왜 필요하나. 한강 소설은 왜 필요하나. 게엠은 왜 필요한가. 드라마는 왜 필요한가. 야구는 왜 필요한가. 뮤지컬은 왜 필요한가. 없어져도 먹고사는 데에 문제가 없는 것들을 다 없애면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배를 채우고 잘 곳만 있으면 모든게 해결된다고 생각하면 도시는 왜 필요한가. 왜 다들 그렇게 바득바득 서울에 몰려살고 있는건가.


상업영화의 몰락에 다들 박수를 치는 현상을 보며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다들 불만이 단단히 쌓였구나. 이 기회에 독립영화가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댓글도 보였다. 상업영화가 죽으면 왜 독립영화가 살 거라고 생각하지? 대체제 개념이 아닌데? 상업 시장이 죽으면 독립 시장도 죽는다. 우리나라에서 독립영화에 돈을 대는 가장 큰 창구는 영진위다. 영진위는 세금 지원도 받지만, 발전기금도 중요 재원이다. 영화발전기금은 영화 티켓을 사는 만큼 축적된다. 상업 영화가 줄어 티켓 세일즈가 줄면 영화발전기금도 줄어든다. 상업 영화가 없어진 틈을 독립영화가 메꾸려면, 그만큼 건실한 독립 프로덕션이 많아야 한다. 독립 프로덕션이 존재하려면, 독립영화 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시장에선 기획개발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그러니 내 주변 모든 감독이 놀고 있다. 99%의 감독이 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무엇을 먹고 살까. 다들 저축해둔 돈을 까먹으며 알바를 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얼마 안 갈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코로나가 발발한 이후 무려 5년간을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다. 당장 나조차 취업자리를 찾고 있지 않나. 내 동료 감독 중 최근에 독립장편을 개봉시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이 있다. 상을 휩쓸고 괜각도 많이 들었다. 축하 연락을 했다. 여기저기 연락을 많이 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감독도 놀고 있다고 한다. 그 어떤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게 우리나라 영화계의 현실이다.


취업은 되지 않고, 시나리오는 뭘 써야할지 모르겠다. 취준생도 영화감독도 아닌 이상한 포지션에 있는 느낌이다. 뭘 써도 팔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그 어떤 것도 써지지 않는다. 기존의 공식을 버리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데, 그런 새로운 영화를 쓰면 투자할 사람이 있나? 기존 투자사는 투자할 돈이 없다며 극장을 팔려고 하고, 새로 들어오는 투자사가 없는데? 그래서 단편 소설을 썼다. 글을 쓰고 싶었다. 막상 쓰고 나니 허탈했다. 보여줄 창구가 없다. 찾아보니 신춘문예나 문예지 투고가 아니면 단편 소설은 딱히 공개할 플랫폼이 없더라. 그래도 소설은 계속 써보려고 한다. 런닝머신을 뛰는 느낌으로. 뭔가를 남기기 위해, 증명하기 위해 런닝머신을 뛰는 건 아니니까.


서류를 광탈만 하다가 딱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정말 오랜만에 면접을 봤다. 영화 지원 프로그램 면접을 중간중간 보기는 했지만, 취업 면접은 10년 넘게 보지 않았다. 간만에 보니 긴장이 되었지만, 나는 원래 면접에 강한 편이라 현장에 가니 긴장이 풀렸다. 상대방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경력이 애매하다던가, 연출을 했던 사람이 우리 일을 잘 한다는 보장은 없다던가, 그런 말을 내 면전에 대고 하는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의구심이 있으면 서류를 탈락 시키면 되지 않나. 왜 면접에 불러놓고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 건가. 물론 이해는 한다. 서류를 스크리닝 한 사람과 면접관이 다른 경우는 빈번하니까. 면접관이 이력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상태로 들어오는 경우는 많이 겪었다. 십여년도 더 전에. 하지만 그때는 대기업 면접들이었다. 지원자가 천 명, 많으면 만 명 단위에 면접 대상자가 몇 백 명의 경우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면접을 본 회사는 총 직원 수가 스무 명도 되지 않는 중소기업이다. 지원자 수가 얼마 되지도 않을 거고, 면접대상자가 끽해봐야 스무명도 안 될 텐데 이력서를 읽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백번 양보해 너무 바빠서 못 읽었다 치자. 그걸 지원자 앞에서 티 낼 필요가 있나? 전 무례한 사람입니다 라고 드러내는게 무슨 이득이 있는 걸까? 자기만족인가? 참 저질스러운 취향이네.


얼마 남지 않은 친구 중에 한 명이 나의 상황을 듣더니 너무 부정적이라고 했다. 뭘 새삼스럽게. 그걸 처음 알았느냐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친구는 진지했다. 원래 우울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근데 지금 넌는 과거의 선택들이 전부 잘못되었고 그로인해 지금의 인생이 되었다며 현재의 상태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 단순히 우울한 것과 인생 전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건 다르다. 그게 뭐가 다른지, 난 그런 성향이라 우울한 거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를 논리로 이겨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나을지 의견을 구했다. 그는 나에게 현재'만' 바라보라고 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게 아니고, 과어게 대한 반성을 하지 말라는게 아니고,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를 보라고 했다. 현재 나의 기준은 과거란다. 어려운 얘기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가령 이런거지. 내가 지금 일이 없는건 과거 드라마 연출 제의를 거절하고, 저예산 상업 장편에서 하차해서가 아니라, 현재 영화 산업이 안 좋기 때문에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럼 현재 나는 무엇을 하면 될까. 현재의 상황에서 할 것을 찾으면 된다. 꽤나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현재를 살자. 과거의 결과로서의 내가 아니라, 현재의 현상으로서의 나를 살자.


그래서, 오늘은 무엇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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