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뉴스를 틀어놓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짐을 챙겨 운동을 하러 나간다. 두시간의 격한 운동 후에 집에 들어와 점심을 요리해서 먹고 뒷정리를 한다. 집안일 해야할 것들을 챙기고 난 다음엔 집을 나서 동네 카페에 간다. 노트북을 펼치고 소설을 한 장에서 두 장 쓰면서 커피를 마신다. 집에 오는 길에 장을 보고 저녁을 만들어 먹는다. 소화를 시킬겸 동네를 산책한 후 배가 좀 꺼지면 들어와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든다.
감정을 싣지 않고 건조하게 내 하루를 써보았다. 저렇게만 쓰니 꽤나 성공한 사람의 삶 같기도 하고, 평화로운 나날일 것만 같다.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삶이다. 하지만 나는 자괴감에 괴로워하고 우울감의 늪에서 발버둥친다. 저 평화로운 하루 내내 내가 뭐하고 살고 있는 거냐며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피드백을 기다리거나, 출강을 나가는 등 일을 하는 중에 저런 하루를 보내는 것은 우울감이랑 거리가 멀었다. 소설책도 한권 내보고 싶었기에, 일을 하는 중간에,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 동안에 소설을 써보곤 했다. 하지만 영화를 포기하고, 일이 없는 상황에서, 저런 하루를 보내는 것은 완전히 느낌이 다르다. 완벽하게 똑같은 루틴의 하루지만, 일이 있을때는 여유를 즐기는 내가 되고, 일이 없을때는 시간을 죽이고 있는 백수의 하루가 된다.
결국 내 상태는 내 생각이 정한다. 일이 있을때의 나는 자기 시간을 주도적으로 쓰는 프리랜서 예술가가 되지만, 일이 없을때의 나는 배때지가 부른 시간 살인마 백수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위와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었다. 그렇게만 살면 행복할 것 같았다. 정작 그렇게 살게 된 지금, 나는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다. 누군가에겐 소망과도 같은 나의 일상, 나 스스로도 원했던 이 일상이 왜 이렇게 지옥같을까.
40년된 구옥에 살 때, 겨울이 올 때마다 따뜻한 집에 살게 되기를 빌었다. 그렇게만 되면 정말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따뜻한 집에 살게 되었는데 왜 나는 우울하기만 할까.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라서 그런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내가 봉준호 만큼의 성공을 거둬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이야 다음 영화를 한 편만 더 찍을 수 있다면, 영화로 밥벌어 먹고 살 수 있게 된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하지만, 막상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만들 수 있게 되어도 난 우울해지지 않을까. 또다른 불만점이 생기면서, 자괴감에 빠져서, 스스로를 증오하면서.
감사일기를 쓰면 도움이 된다길래 써본 적이 있다. 나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충분히 '행복을 느낄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안다. 그것을 몰라서 우울한게 아니다. 감사일기를 써봤자,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생각이 든다. 삶이란 것은 결국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항아리만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 것이 아닐까. 그 항아리가 언젠가는 찰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아무리 채워봤자 채워지는건 공허일 뿐인데.
불교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가르친다. 나는 모든 것에 집착하고 있다. 물질에, 명예에, 관계에, 허울에. 하지만 집착을 빼면 나에게 무엇이 남나. 생각하기 나름이란 걸 너무 잘 알지만, 그 생각이라는 놈이 제일 바꾸기 어려운 거 아니었나. 비만인 사람에게 먹는 걸 줄여봐, 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잖아. 정치성향과 반대인 정당의 대통령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지지하는 정당을 바꿔봐, 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잖아. 생각을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었으면 모두가 부처가 되었겠지. 공수레 공수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