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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일기

by Renaissance

똥 싸는 기록이 아니다. 감정을 배설할 창구로 브런치에 일기를 쓰는 것 뿐이다. 괜찮은 제목이라고 생각하고 썼는데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미리 밝힌다.


술을 좋아하지만 최근 술을 아예 마시지 않았다. 이유는 명료했다. 술을 마신 후 취기가 올랐을 때 할 만한게 딱히 없어져서다. 알콜중독자가 아닌 사람들은 술을 수단으로 사용한다. 회식을 하는 이유는 고된 일에 대한 회포를 푸는게 아니라 술 김에 마음에 담아둔 말을 서로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한번씩 배설 창구를 만들어줘야 감정이 쌓이지 않고 같이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회사에 다녔으면 팀장급인 나이가 되다보니,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은 모두 팀장이거나 팀장이 아니어도 뭔가를 책임지는 직책이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내가 회식을 싫어하는 사람이니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너도 나중에 상사가 되면 회식을 좋아하게 될거라는 상사들의 예언과 다르게 나와 내 친구들은 여전히 회식을 싫어한다. 그래서 회식을 안 하는데 공통점은 팀원들이 회식을 하자고 조른다는 것이다. 나도 영화를 찍으면서 회식을 안 했는데 스태프들이 하자고 졸랐다. 되게 기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회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친구들의 말을 들어보니 같이 밥도 안 먹고 회식도 안 했더니 팀원들이 회식을 하자고 졸랐다는 것이다. 술김에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못하니 팀장에게 회식을 하자고 조르는 것이리라. 회식을 했더니 평소에 눈치채지 못했던 속에 담아둔 말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분기에 한번씩은 회식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술을 마시면 전두엽의 마비로 자신감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엔 못했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연애의 윤활유로 쓰이기도 한다. 꼭꼭 싸멘 감정을 술의 힘을 빌려 분출함으로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꼭 다른 사람과 함께하지 않더라도 평소에 잘 울지 못하던 사람이 혼자 술을 마시고 눈물을 터뜨린다던가, 노래를 부른다던가, 연락을 못하던 사람에게 연락을 한다던가 등 혼자 술을 마시면서 할 수 있는 배설도 많다. 나는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모두 정리해놓았기에 술을 마시고 빠르게 영화를 찾을 수 있고, 보고 싶은 씬을 보면서 전율을 느낀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데 단층주택에 살 때에는 마음껏 췄지만 아파트에서는 언강생심이다.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고 내 감정을 배설하듯 쏟아내고 싶지만 사람은 변기도 아니고 쓰레기통도 아니다. 내 배설창구로 마음껏 쓸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AI가 발전하면 반려 로봇이 생길 것이고, 이 역할을 해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때가 되기 전까지 나는 무척 실례인 이 행위를 하지 않으려 한다. 20대 때 많이도 했고, 많이도 미안해 했다.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여 이젠 아무리 술에 취해도 누군가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는 것이 더이상 나의 감정을 배설해주지 못하자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유튜브도 금방 질렸다. 쇼츠도 마찬가지다. 술 마시고 쇼츠를 보고 있다보면 오히려 화가 났다. 평소엔 그냥 이런 것도 있구나 하면서 보다가 흥미가 없어져 끄고 마는데 술에 취하면 사람들이 이런걸 본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 술을 마시고 책을 읽어봤지만 다음날 뒤죽박죽이 되어있는 책 내용 때문에 독서에 방해가 되었다. 악기 연주도 해봤는데 나는 자유 연주가 불가능하고 아는 곡들만 연주하다보니 금방 흥미를 잃었다. 술을 마시고 할만한 일이, 내 감정 배설에 도움될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게 되자 술을 안 마시게 되었다.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다 오늘 술을 마셨다. 그리고 할게 없어서 이렇게 브런치에 배설을 하고 있다.


캐스팅은 지지부진하고, 영화계는 망해가고, 제작사도 못미덥고, 개봉하는 영화들은 재미없고, 일은 하고싶고, 하지도 않던 게임을 하면서 쉬려고 노력하다 이젠 게임도 질렸고, 한동안 소설을 써봤는데 1막을 쓰고 다시 읽어보니 이런 쓰레기가 없더라. 언제 캐스팅이 돼서 프리프로덕션에 들어갈지 모르니 작업 의뢰를 다 쳐냈는데 괜히 그랬나 싶다. 최근에 대형 제작사에서 시리즈 각본 의뢰가 왔는데 기획개발 계약이라서 조건을 물어봤다. 말을 안 해주더라. 일을 의뢰하면서 얼마를 줄지 얘기를 안 하면 뭐 어쩌자는 건가. 자기들이 대형 제작사니까 푼돈을 줘도 써줄거라는 자신이 있는건가. 내 글이 마음에 들고, 내 경력도 알고 있고, 본인들이 먼저 의뢰를 해놓고 계약조건을 말해주지 않는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공짜로 기획안을 받아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내가 프로젝트에 욕심이 있었다면, 절박한 상황이었다면 그냥 기획안을 썼을 수도 있다. 근데 안 썼다. 안 하고 말지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 후회중이다. 조건이 조금 안 좋더라도 지금 정신상태에서는 일을 하는게 나았을 수도 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나는 잘못된 선택만 하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여러 선택의 기로가 있었다. 내가 찍은 독립장편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진 못했지만 한국 영화계에 아주 조그마한 흔적은 남겼다. 내 기대만큼 많은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내가 열심히 여기저기 두드렸기에 이런저런 제안을 받기는 했었다. 어떤 제안은 거부하고, 어떤 제안은 하다가 중간에 엎고, 어떤 제안은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면, 내가 옳은 선택을 했던건가 의구심이 든다. 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했지만 과연 내가 상황 분석을 잘 했던 것일까? 내가 처한 처지를 정확하게 알았던 것일까? 모르겠다. 역시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다. 이상한 글이나 쓰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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