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목적

by Renaissance

이 브런치는 왜 존재하는가


이전 글에 언급한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이 블로그에도 던져보자.

"나는 왜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가."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기록으로서의 가치이다. 페이스북은 2000년대 초반부터 존재했던 아주 오래된 서비스지만 한국 사람들이 즐겨 이용하게 된 것은 아이폰3GS가 한국에 출시되고 난 이후이다. 아이폰을 독자적으로 출시한 KT는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시장 1위를 달성할 만큼 한국인들은 너도나도 아이폰을 샀고, 그때까지 한국을 주름잡던 싸이월드는 스마트폰의 등장을 전혀 예상도 못했다는 듯이 앱은커녕 변변한 모바일 페이지조차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스마트폰이 도입되자 컴퓨터에 앉아있을 때만 접속할 수 있는 SNS는 재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틈을 페이스북이 메웠다. 본인이 접속해서 방명록이나 댓글을 직접 확인해야 하는 서비스와 실시간으로 댓글 알람을 보내주는 서비스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시장 1위 싸이월드는 그렇게 허탈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페이스북이 미국에서 서비스 되자마자 가입을 했던 나는 다른 이들보다 서비스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후죽순 친구 신청을 해대는 주변인들을 가이드해 주는 얼리 어답터 마냥 페이스북에 어떤 글을 쓸 수 있고 어떻게 공유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나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는 시기에 하필 취직을 했고, 나의 페이스북은 회사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페이스북에 쓴 글들을 재밌게 읽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야근과 주말출근에 치여 가까스로 확보한 개인 시간에 친구들을 만나면 으레 나의 페이스북 글 얘기가 주제가 되곤 했다. 그런 글을 써도 회사에서 안 혼나냐 부터 더 자주 올려달라는 요청까지. 어느새 내 페북글에는 '옥중일기'라는 제목까지 붙어서 자기네들끼리 카톡으로 공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비상식적인 것에 모두가 수긍하고 사는 것을 보면 열을 더 받는 성격이라,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런 점들이 보일 때마다 분노로 글을 토해냈던 것뿐인데 그게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 못하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를 하면서 페이스북은 점점 쇠퇴하고 인스타그램이 대세가 되었다. 사진이 중심인 인스타그램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진 없이 글로만 페이스북을 운용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왜 그런 글을 올리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난조의 질문이었고, 그 질문이 너무나 기분 나빠 페북의 모든 글을 비공개로 바꾸어버렸다. 그 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내 글을 캡처해 놨다가 나중에 공격의 도구로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비공개글은 나만 볼 수 있으니 사적 기록으로 남아있고, 가끔 그 글을 보는데 흥미롭기 그지없다. 이 당시에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구나, 이 시기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 과거의 나와 대면하는 느낌이 난다. 페이스북에 글을 멈춘 후 따로 일기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에 공백이 생겼다. 여전히 난 불만에 가득 찬 사람이니 글이 중심이 되는 블로그를 에세이 형식으로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페북의 글도 짧은 에세이나 시 형식이었다.)


두 번째는 광장으로서의 역할이다. 회사를 다닐 때 차장님이 자신의 아랫사람들과 기회만 되면 술을 마시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왜 저분은 성격도 좋고 멀쩡한 분이 친구를 만나지 않고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실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 내가 그 나이가 되니 친구를 부르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소통할 사람은 필요하다. 회사 사람들, 특히 아랫사람들이 가장 만만한 사람들일 거다. 나는 회사를 다니지 않는 프리랜서고, 기혼이든 미혼이든 친구를 부르는 게 부담스럽다. 내가 힘들어서, 내 감정 쓰레기통을 해달라고 친구를 부르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들이 내 감정을 받아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는다. 40은 그런 나이다. 남의 감정을 받아줄 여유가 없는 나이. 심리상담가 선생님을 만나서 소통하고 싶은 욕구를 풀면 좋겠지만 한 시간에 십만 원 이상을 지출해야 한다. 운동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면서 어깨 재활치료에 돈을 쓰고 있지 않는 내가 한 시간에 십만 원 이상을 상담으로 지출할 리가. 그 돈이면 재활치료를 받지.(아이고 어깨야...) 나의 감정을 배설할 창구가 필요하다. 그게 광장이면 참 좋겠다. 그래서 찾은 곳이 여기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글을 논리 정연하게 정리하는 강박이 있는 나라면 이런 광장도 나쁘지 않겠다.


세 번째는 생각의 정리다. 사람은 3이라는 숫자에 안정감을 느끼고 강박을 갖는다고 하는데 여전히 나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여지없이 세 번째를 써 버리네. 나는 자기개발서를 포함한 비소설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내가 읽는 책의 98%는 소설이다. 나머지 1%는 역사를 포함한 교양서이고, 1%는 수필, 에세이다. 수필만 쓰는 작가의 책은 읽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가 수필을 써내면 그걸 읽는다. 좋아하는 작가이니 문체를 좋아하는 데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엿볼 수 있어서다. 단순한 물건이나 장소에서 온갖 생각을 떠올리는 글을 읽으면서 경탄한다. 어떻게 여기서 이런 생각까지 이어지지? 사람은 자기 객관화가 안 된다고, 무슨 이런 걸 가지고 그런 생각까지 하냐는 말을 평생 들어온 나다. 나야말로 수필을 쓰기에 최적화된 인간 아닌가. 하루의 대부분을 공상으로 지내기 때문에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낭비다. 글을 써야 하는 인간이다. 머릿속에 몽실몽실하게 솜사탕처럼 피어오르는 생각은 글을 써야 비로소 정리가 된다. 혼자 쓰는 글도 논리 정연하게 쓴다고 언급했는데, 그 논리 정연의 방법이 개요를 써서 정리하는 게 아니다. 글을 쓰면서 논리구조를 세우고, 글을 쓰면서 전개한다. 글을 쓰기 전에 생각하는 건 주제뿐이다. 가끔은 첫 문장만 생각할 때도 있다. 어차피 계속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 첫 문장을 쓰면 어떤 글을 쓰려는 건지 윤곽이 잡힌다. 그러니 글을 쓰지 않으면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 시나리오 아이템은 당연히 따로 정리를 해두지만, 이런 주제의 글은 따로 정리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수필로 먹고사는 사람도 아닌데.


그래서 쓰려고 한다.

이 브런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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