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에 관심이 많다. 지인들에게는 관심이 하나도 없어서 경조사도 안 챙기는 인간이 인간사에 관심이 많다고 하는 게 역설적이긴 하지만, 지인들이 만약 나에게 좋은 탐구대상이 되어준다면 얼마든지 관심을 가질 의향이 있다. 실제로 지인 중에 탐구하고 싶은 대상은 만나달라고 졸라서 깊은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나 같은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닌)은 그런 대화를 즐겨하진 않는다. 당장 최근에 다른 이와 나눴던 대화 주제를 생각해 보라.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분석하는 류의 대화가 있나? 사람들은 자기라는 인간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MBTI 같이 퉁쳐서 넘어가버린다. MBTI가 이거라서 나는 이런 인간이야, 탐구 끝.
호기심이 밑도 끝도 없는지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매우 편해지긴 했다. 궁금함이 생겼을 때 구글로 찾아보면 되니까. 내 앱 사용 통계를 보면 절대적으로 구글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통화나 문자보다 검색 엔진으로 폰을 사용하고 있다. 하루에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날은 많아도 아무것도 검색하지 않는 날은 드물다. 방금 전에도 선풍기와 서큘레이터의 차이를 검색해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관련 서적을 찾아보거나 가전 회사에 다니는 친구에게 연락을 해야 알 수 있었을 정보를 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답이 나오는 질문은 이렇게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 류의 질문이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무얼까, 나는 어떤 덕목을 우선시하는가,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파트너는 어떤 사람일까 등 쉽사리 답을 낼 수 없는 질문들이다. 나에 대한 탐구는 곧 인간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다른 사람은 어떨까, 영장류는 어떤가, 그럼 포유류는 어떤가 등 탐구 주제는 끝없이 이어진다. 인간에 대한 탐구 중 내가 꼭 답을 얻고 싶어서 몇 년을 고민했던 질문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이재용은 왜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할까'
회사를 다니던 시절 출근하다가 천재지변을 만나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욕을 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매일 '씨발'을 외치며 일어났던 것 같다. 야근하고 새벽 1시에 집에 들어와 네 시간 자고 다시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당연히 욕이 나온다. 욕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야근비를 꼬박꼬박 받았으면 욕을 덜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포괄임금제라는 거꾸로 가는 임금제도 때문에 야근비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야근비를 미리 연봉에 포함한다는 발상은 어떤 영장류의 대가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하튼 그렇게 ㅅㅂㅅㅂ 거리면서 출근을 하다가 옆 본부에 일하는 동기로부터 자기는 나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한다며, 자신이 더 불쌍하다며 구시렁거렸다. 그 이유인즉슨, 클라이언트 회사 대빵이 그 시간에 출근을 하니 거기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빵은 재벌 총수, 대기업 회장님이었다. 나이도 많으신 분이 왜 그 시간에 출근을 할까? 매일 10억씩 써도 죽을 때까지 본인이 가진 돈을 다 못 쓰는 양반이 아침 7시 반에 회사에 왜 출근을 하냐는 말이다. 나는 그게 너무 이상했다. 그리고 자료를 조사해 보니 빌리어네어 중에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자료 조사로 찾을 수 있는 사람 중엔 없는 거다.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그런 사람에 대한 자료는 찾기가 힘들 테지. 버진 그룹 회장, 페이스북 창업자, 테슬라 오너, 워런 버핏 등등 일해서 버는 돈보다 은행 이자가 빨리 쌓이는 이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한다. 일반 사람들이 출근하는 시간과 똑같은 시간에, 혹은 더 이른 시간에. 이재용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매일 출근을 한다. 야근비가 포함된 월급을 받는 평사원과 같은 시간에. 도대체 왜?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3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마음껏 놀기로 했다. 이직은 애초에 생각이 없었고 일단 사표부터 쓴 거다. 아무런 계획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면서 놀았다. 공부도 실컷 하고 배우고 싶은 것들도 배우고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여행도 많이 다녔는데 인도네시아 발리가 나와 너무 잘 맞았다. 계속 있고 싶어서 일을 찾았고, 그렇게 현지 업체에서 일을 하면서 4개월을 발리에 있었다. 다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살고 싶은 곳을 찾았으니 거기서 사는 게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장기 비자를 받기가 너무 힘들어서 3개월짜리 단기 비자를 끊어서 간 거였고, 내가 일했던 업체 사장님은 내가 계속 일해주길 바라셨으니 3개월이 끝나갈 무렵 다시 비자를 끊느냐 한국으로 돌아가느냐의 기로에 섰다. 살고 싶은 곳을 찾아놓고 고민이 되는 게 이상했다. 그렇다. 4개월 동안 변화가 생긴 것이다. 내가 계속 여기에 살면 행복할지에 대한 의문이, 살고 싶은 곳에 살면 인간은 행복한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나를 오래도록 따라다녔던 질문, 이재용은 왜 출근을 하는지에 대해 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흔히들 돈만 많았으면 당장 회사 때려치운다는 말을 많이 한다. '로또 되면 출근 안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일을 하면서 산다. 노는 것도 지겨워진다.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해외 축구를 보기 때문에 이 나라 저나라 축구를 보다 보면 일 년 내내 심심하지 않다지만, 막상 그 사람에게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평생 축구만 보라고 하면 행복할까?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평생 즐겁게 해주는 놀이, 그게 바로 일이다. 취미 하나를 40년간 하라고 하면 못 할 사람이 더 많을 테지만, 일을 40년간 하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을 하면서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즐겁다는 사실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오랫동안 놀아본 사람들은 모두 안다. 나도 고작 1년 반을 놀고 새로운 일을 하겠다며 영화에 뛰어들었다. 영화 한 편 만들 기회를 잡기가 너무 힘들고, 눈탱이를 여기저기서 맞고 다니다 보니 발리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면 행복하지 않았을까, 내가 욕심이 덜한 사람이었으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여전히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상업 영화 연출이라는 두꺼운 벽을 두드리고 있다. 호모 루덴스의 놀이는 노는 게 아니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