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과 [슬픔의 삼각형]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나 대사 등을 통해 숨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메타포라고 한다. 그냥 은유라고 써도 될 것 같은데 영화계에서는 모두가 메타포 라고 하므로 그냥 메타포 라고 하겠다. 영화를 늦게 시작한 국가라서 순우리말 용어는 없고 외래어가 많다. 자동차 용어에 일본어가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계속 외래어를 사용할 예정이라 이렇게 밑밥을 깔아놓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폭우 시퀀스를 보면 반지하 집이 물에 잠기고 변기에서 오물이 역류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장의 영화일수록 상징과 메타포가 넘쳐나는데 영화 전체 러닝타임을 상징과 메타포로 채우는 것이 허락되는 건 거장들 뿐이고, 그렇게 하고도 영화를 재밌게 만드시니까. [기생충]의 수석에 대한 의미만 찾아봐도 수백 개의 글을 볼 수 있다. 물론 나는 남의 해석을 찾아보는 스타일이 아니고 혼자서 해석하는 것을 즐기는데 의도가 다분한 상징이나 메타포는 대게 모두가 비슷한 해석을 한다. 그중 하나가 역류하는 변기가 아닐까 한다.
재래식 화장실은 구덩이를 판 곳에 구멍을 뚫은 나무를 대고 앉아서 용변을 보는 형태였다. 동양은 좌식 문화라서 쭈그려 앉아서 보는 형태였지만 서양은 입식 문화였기에 나무를 의자 높이로 제작해 거기에 앉아서 일을 보게 했다. 하지만 동서양 모두 흙을 퍼서 구덩이를 만들고 거기에 용변을 본 것은 동일한 형태였다. 이유는 명료하다. 사람의 똥이 비료로 활용되기에 어딘가로 흘려보내거나 없애는 구조가 아니라 모으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료 따위 신경 쓰지 않던 귀족이나 왕족의 화장실의 형태가 다르다. 절벽에 지어진 성은 절벽 아래로 똥이 떨어지게 설계되고 성 안에 강이 흐르는 곳에서는 용변이 강으로 떨어지게 설계되는 식이다. 지금의 수세식 화장실은 모두가 귀족인 세상인 것이다. 화학비료를 쓰게 된 현대에는 사람의 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되었고, 수세식 화장실에서는 똥을 하수도로 흘려보낸다. 우리 집 화장실은 깨끗하지만 하수도는 똥으로 가득 차게 된다. 내 눈앞의 더러움을 없애는 대신 똥으로 가득 찬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눈앞에서 더러운 것이 없어질 뿐,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해 똥은 어딘가로 보내지는 것뿐이다. 하지만 아무도 똥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변기를 내리면 똥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세식 화장실은 돈과 부, 혹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상징으로 쓰인다. 기생충에서 변기가 역류하는 건 우리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우리가 보려 하지 않던 추악한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은유한다. 애써 보지 않으려 하는 노인빈곤 문제나 소년가장 문제는 오히려 커지도 있다. 자본주의가 오래된 사회일수록 빈부격차는 커지고 빈곤층이 더 많아지는데 우리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엄연한 진실이고, 사회가 마비되면 터져 나올 것이 자명하다. 역류하는 변기처럼.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고 가녀린 몸을 변기 뚜껑에 걸친 채 씁쓸하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집안의 막내딸, 여성, 청년인 기정(박소담 역)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역류하는 변기는 사실 많은 영화에서 봐왔던 장면이다. 사실 메타포라고 부르기 애매하고 직유적 표현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에 역류하는 변기가 다시 등장한다. 2020년 칸 황금종려상 영화(기생충)에서 쓰인 장면이 2022년 칸 황금종려상 영화(슬픔의 삼각형)에 또 쓰인 것이다. 직유에 가깝기 때문에 기생충을 오마주한 장면으로 보기 어렵다. [슬픔의 삼각형]도 스러져가는 자본주의를 비판한 블랙 코미디 작품이고, 계급의 전복을 보여주는 여러모로 기생충과 맞닿아 있는 영화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썼기 때문에 본인이 만들려는 영화가 기생충과 주제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미 2017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감독이기에 칸이 늘 그러하듯 외스틀룬드 감독을 매년 초대했을 것이고, 칸에서 기생충을 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외스틀룬드 감독은 역류하는 변기 장면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영화를 하는 사람이기에 그런 게 궁금하다. 역류하는 변기 이미지를 뺀다고 해서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슬픔의 삼각형]은 거장이 만든 걸작 영화다. [기생충]이 더 위대하다고 우길 생각은 1도 없다. 두 영화 모두 걸작이고, 두 감독 모두 거장이다. 그래서 궁금한 거다. 왜 외스틀룬드 감독은 기생충에서 똑같은 장면이 등장함에도 역류하는 변기 이미지를 포기하지 못했는가. 이미 많이 쓰여왔던 상징이라서? 그렇다면 더더욱 본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상징을 만들면 된다. 더 잘 찍을 자신이 있어서? 침몰하는 자본주의를 홍수로 보여주는 [기생충]과 침몰하는 배로 보여주는 [슬픔의 삼각형]은 이미 비슷한 상징과 메타포가 너무 많다. 어차피 비슷하니까 과감해지기로 하셨나? 이재용은 왜 매일 아침 출근 하는가를 궁금해하는 나 같은 인간은 이 따위 것이 너무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