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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Oct 17. 2023

관심을 가져야 눈에 보인다

옷걸이를 샀다. 양복용 옷걸이가 필요해서 사려고보니 나는 옷걸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 광고회사를 다녔던 터라 양복을 매일 입을 필요가 없었지만, 양복을 입은 날이면 하얀 와이셔츠를 세탁소에 맡겨야 했다. 세탁소에 와이셔츠를 맡기면 세탁 후 옷걸이에 걸어주지 않나. 그 철제 옷걸이가 하나씩 쌓이니 굳이 옷걸이를 사야할 필요가 없었다. 양복용 옷걸이는 양복을 사면 줬다. 나에겐 양복이 두벌 있는데 그 두벌 다 옷걸이 아래가 봉으로 연결된 형태고, 그 봉에 스폰지가 감겨있어 바지를 걸었을때 주름 자국을 남기지 않는 역할을 했다. 그 양복 옷걸이가 오래되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바닥에 이상한 검은 자국이 생길 때마다 내가 뭔가를 흘렸겠거니 했다. 


꽤 오랫동안 의문의 검은 자국, 검은 물질을 닦아냈다. 그러다 원인을 찾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정말 불현듯이다. 검은 자국은 집안 곳곳에서 발견되었지만 가장 빈번하게 발견되는 곳이 옷장이었기에 범인은 옷장 속에 있을 것임을 확신했다. 옷장 바닥을 잘 살펴보니 양복을 걸어둔 곳 밑에 검은 가루들이 있었다. 양복을 입지 않은지 몇 년이나 되어서 발견하지 못했던 거다. 양복을 꺼내니 옷걸이 밑 봉의 스폰지가 오래돼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한국의 여름을 견디지 못한 것인지, 원래 오래되면 그렇게 산화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스폰지라는 것도 석유로 만들지 않나. 기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스폰지를 벗겨내고 벅벅 닦다가 이걸 닦을게 아니라 새걸 사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옷걸이에 대해 알아보는데 옷걸이를 사본 적이 있어야지. 어떤 걸 사야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쿠팡에서 가장 상품평이 많고 좋은 옷걸이를 대량으로 주문했다. 지금까지 철제 옷걸이나 얇은 플라스틱 옷걸이에 거느라고 어깨에 자국이 남은 옷들을 한꺼번에 좋은 옷걸이로 바꿔주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치 앞도 계산이 안 되는 무식한 나는 옷걸이가 클 수록 옷장에 걸 수 있는 옷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한 거다. 그래서 꼭 양복 옷걸이에 걸어야 하는 옷들만 걸고 나머지는 창고에 넣어뒀다. 옷걸이를 정리하는 김에 옷 정리를 다시한번 싹 했다. 옷이 이렇게나 많고, 옷을 잘 관리하기로 소문난 내가 왜 진작에 옷걸이를 사지 않았을까. 


독립한지 20년이 되어간다. 원룸이건 빌라건 주택이건 아파트건 항상 옷장은 있었다. 물론 원룸은 옷장은 아니고 바닥과 천장에 설치하는 조립형 옷걸이였지만 옷장의 역할을 하는 무언가가 언제나 있었다. 20년간 옷걸이를 살 생각을 못했다니. 너무 웃기지 않나. 어렸을때는 몸을 예쁘게 만들면 아무거나 입어도 예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몸을 키우고 정말 말 그대로 별의 별 스타일의 옷을 다 입었다. 그게 몸 때문만은 아니고 젊어서 가능했다는 것은 나이가 들고 알았다. 이젠 특정 스타일의 옷을 입으면 우스꽝스러워 진다.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의 옷이 점점 줄어드니 멀쩡한데 입지 못하는 옷들이 늘어난다. 입지 않은 옷들이 많아지니 관리의 사각지대로 벗어난 옷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러다 이지경까지 온 것이다. 옷걸이의 스폰지가 기름으로 돌아가는 지경까지. 그덕에 내가 옷을 관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정체불명의 검은 자국을 처음 발견했을때 그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기울였다면 금방 눈치를 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관심을 가지지 않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들이 아직도 산재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각할 능력은 없다. 그저 무심하게 스쳐간 것들에 대해 한번 더 관심을 주기로 결심할 뿐이다. 커리어도, 인간도, 다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관심을 미처 주지 못한 배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지금 대성한 배우 중에 내가 스쳐지나간 배우가 없었을까.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사회 문제, 부조리, 불의, 다 마찬가지다. 관심을 가져야 눈에 보인다. 관심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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