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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Oct 11. 2023

불만의 이점

동기부여에 대한 글을 쓰다 말았다. 어제 쓴 글인데 쓰다보니까 한도끝도 없더라. 나는 일단 머릿속에서 쓸 글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를 짜고 글을 쓴다. 그러다가 내가 대략적으로 짰던 글의 논리구조가 맞지 않으면 잠시 멈춰서 논리를 보강한다. 그러다가 논리가 부족하면 글을 멈춘다. 브런치엔 저장 기능이 있더라. 페이스북에서는 그렇게 쓰다 날린 글이 부지기수로 많다. 


짧은 글 한정이다. 긴 글을 쓸 때에는 따로 개요를 쓰지 않고 글을 쓰는 경우는 없다. 거의 없다가 아니라 그냥 없다. 개요를 쓰지 않고 긴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의미한 것인지 너무 잘 안다. 나는 한글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굉장히 늦은 사람이고, 그래서 성인이 되고도 짧은 글을 쓰기 어려워했던 사람이니, 개요의필요성을 너무너무 잘 안다. 그래서 개요를 쓰지 않고 글을 쓰는 동료들이나, 학생들을 보면 개요의 중요성을 백번 천번 강조한다. 브런치 글을 그렇게 쓰라고 하면 나는 몇 개 쓰지 못할 것이다. 연출을 업으로 삼고자 했으나 글을 업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브런치 글까지 그렇게 쓰면 스트레스 받아서 못 하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영화에서 멀어지고자 했고, 역도를 하면서 잘 살고 있으니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게 되더라. 동기부여에 대한 글을 왜 쓰고자 했는지 트리거가 기억나지 않지만, 글을 쓰면서 느낀건 내 글의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는 불만이라는 것이다. 비상식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인간같지 않은 인간에 대한 분노가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고, 창작물을 만들게 한다. 


예전에도 이 주제로 동료 감독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엄청난 창작 활동으로 유명한 감독의 GV에서 모더레이터가 창작의 원천을 물었고, 그에 대한 긴 답변을 들은 후 우리는 각자 어떤 원천이 있는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때 분노라고 답했던 것 같다.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분노에서 시나리오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페북도 그렇고, 지금의 브런치 글들도 그렇고, 그게 맞는 것 같다. 나는 에쿠니 가오리 같은 유려하고 섬세한 문장을 절대 쓰지 못할 것이고,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인간 내면의 깊은 탐구를 못할테지만, 분노에 기반해서 많은 작품을 써낼 것이다. 분노류 창작자들의 장점이 창작 활동이 왕성하다는 것이다. 캐스팅이 안 되고 또 말도 안 되는 계약 조건을 들어서 기분이 나쁜 이 때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역도를 열심히 하며 영화에서 멀어졌을 때에는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내 창작의 원천은 분노가 확실하다. 이 브런치에 더이상 글이 올라오지 않으면 내가 성공해서 바쁘다는 의미이거나, 늙어서 예전처럼 분노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누구에게 소리를 지르는지 모르겠는 화난 할아버지들을 생각하면 내 분노가 나이에 따라 사그러지진 않을 것 같다. 지하철역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소리를 지르는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 내 가장 큰 두려움이었는데, 그걸 이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 나쁘진 않을 수도. 뭔 이딴 결론이 다 있지. 역시 글은 개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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