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늦게 쓰기

by Renaissance

나는 시나리오를 빨리 쓰는 편이다. 장편영화 아이템이 잡히면 시놉시스를 열줄로 구성하며 스토리를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열줄이 완성되면 시나리오로 옮기는 데에 한 달이 걸리지 않는다. 중간단계인 트리트먼트를 쓰지 않고 바로 시나리오로 옮기는데, 운이 좋아서인지 지금까지 트리트먼트를 요구하는 제작자가 없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시간에 시나리오로 보여드리겠다고 하니 굳이 트리트먼트를 요구하지 않은거다. 물론 남들에게 컨펌을 받아야 하는 경우 열줄 시놉시스를 좀 더 길게 쓴다. 돈을 주는 사람과 방향성을 합의하고 각본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너무 짧은 열줄 시놉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이 힘들다. 시나리오를 어쩌다 이렇게 빨리 쓰게 되었을까.


첫 시나리오는 독학으로 혼자 썼으니 패스하고, 영화 학교에 들어가서 장편 시나리오 쓰는 법을 배울 때 선생님이 추천한 방법이 열줄 시놉이었다. 그리고 열줄 시놉에서 트리트먼트로 발전시키고, 그 후 시나리오를 쓰는건데 사람 스타일에 따라 시놉에서 시나리오로 바로 가기도 한다고. 나는 어떤 스타일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열줄 시놉을 정리하는 순간 영화 한 편이 머릿속에 정리가 되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빨리 쓰고 싶어 안달이 났다. 신나서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하루에 20씬 30씬을 쓰는 경우가 생겼고, 빠르면 10일만에 시나리오를 다 쓰기도 했다. 시나리오 기계라는 별명이 그래서 붙은건데, 그냥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남들보다 생각의 속도가 빠르다거나, 더 부지런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격이 그런거라고. 일이 있으면 빨리 마무리를 하고 싶어하고, 성격이 급한 것이 시나리오를 빨리 쓰는 스타일에 한몫 하지 않았나 싶다.


업계에 들어오니 빨리 쓰는 것은 매우 큰 장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 쓰는 사람이 많이 없다보니 급한 의뢰는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악용하는 제작자들도 많았고, 시나리오를 다 쓸 때까지 계약을 안 하고 있다가 바로 도장을 찍어줄 것처럼 하더니 시나리오를 받더니 입을 싹 닦았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기 때문에 남은 그들의 삶이 불구덩이에서 타오르는 고통을 매일 느끼길 바랄 뿐이다. 아니면 빨리 죽던가.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천천히 쓰는 중이다. 굳이 급하게 쓰지 않으려 한다. 그랬더니 시나리오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다. 빨리 쓸 때는 열줄 시놉을 쓰면서 구상했던 씬 구성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천천히 쓰니까 자꾸 씬 구성이 달라진다. 써놓은 것을 다시 읽어보니 씬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도 있고, 며칠동안 안 썼더니 더 좋은 씬 구성이 떠오른 경우도 있다. 뭔가 더 연출적인 부분을 고려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 느낌이랄까. 어차피 남에게 연출하라고 팔 시나리오도 아니고, 지금 시장에서 팔릴 것 같지도 않으니 장점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호흡적으로 매끄러울지는 모르겠다. 다 쓰고 나서 읽어봐야 판단할 수 있겠지만 내 시나리오의 특징은 한 호흡에 깔끔하게 잘 읽힌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빨리 써서 그런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시나리오는 어떨지 두고봐야겠다.


할리우드 파업으로 인해 미국 영화가 안 들어오고, 한국 배급사는 묵혀둔 한국영화를 풀 생각이 없어 보이니 극장이 빈다. 그 빈틈을 OTT 영화가 메꾸고 있다. 정말 엄한 시절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영화계 사람들은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 모두 동의한다. 투자 최종 결정을 하는 윗사람들은 과연 동의하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들이 바뀌어야 바뀔텐데. 정말 오랜만에, 투자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고, 처음으로 느긋하게 쓰고있다. 과연 완성된 시나리오는 어떤 모습일지. 참고로 현재 30씬이다. 완성되면 읽어보고 후기 남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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