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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naissance Jan 08. 2024

아프니까 실존주의다

실존주의를 처음 접한건 고등학교 때였다. 수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숙제가 에세이였던 국제학교를 다녔다. 물리 수업 숙제가 에세이인 판에, 과연 언어 수업은 어떤 숙제가 나올까. 고전 문학책 리스트를 주고 그 중 두권을 골라 하나의 주제로 논문 수준의 글을 써야 한다. 숙제 이름 자체가 thesis이니 논문이라는게 과장이 아니다. 실제 논문처럼 써야했고 심사도 가혹했다. 통과를 못하면 낙제다. 언어 수업에서 낙제를 당한다는건 학년을 꿇어야 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참 대단한 교육이지 않나. 당할땐 거지같았지만 지나고나니 어찌나 고마운 과정인지. 내가 고른 책 중 하나는 이방인이었고, 자연스럽게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모태신앙에서 멀어지는 사춘기 시절에 실존주의 철학을 접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생각이 많아졌을지 설명 안 해도 알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에 실존주의를 접한 것이다.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실존주의 철학이 무서웠다. 영원히 살 것 처럼 행동하는 인간, 영원한 삶을 가정한 인간의 행동을 부조리라고 일갈을 날리는 실존주의.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영원한 무의 상태가 되는데, 그것을 두려워하면서 매일을 살아야 한다니 이런 억지가 어딨나. 누가 죽음을 생각하며 사나, 내일을 생각하며 살지.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 인간을 진솔한 존재로 만들어 주고 가장 생동감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난 실존주의자가 되겠어. 그 후로 많은 철학을 접하고 니체주의, 허무주의에 더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은 곳엔 실존주의가 자리잡은 것 같다. 첫경험 같은 거랄까. 


아무렇지 않게 사표를 던지고, 아무 계획 없이 여행을 다니고 놀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철학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1년을 넘게 놀자 주변인들이 내 걱정을 더 많이 했다. 쉰 기간이 1년이 넘으면 취업이 잘 안 될텐데 뭐하려고 그러냐, 사업 할 거냐, 모아둔 돈은 충분하냐 등등. 그러는지 마는지 나는 더 열심히 놀았고, 해외에 나가 4개월 살다가, 영화감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실존주의의 도움이 없었으면 그렇게 과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을 항상 직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 언제나 죽음만 생각할 수는 없다. 매주 일요일 죽음을 직시하러 갈 실존주의 성당같은건 존재하지 않는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고 설교해줄 신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 휘둘리다 보면 어느덧 내가 곧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러다 몸이 아프면 깨닫는다. 아, 나 죽는 중이지. 


최근에 영 좋지 않은 곳에 염증이 생겼다. 고름집이 생겼는데 아직 크기가 작아 수술을 할 정도는 아니고, 수술을 해야할 수준으로 발전할지 말지 확률이 50:50이란다. 큰 수술을 할지 말지 랜덤이라니. 계속 신경쓰여서 큰 계획을 세우기가 애매해졌다. 예를 들면 여행 계획을 세우면 기간을 짧게 잡을 수 밖에 없고, 몸에 무리가 갈만한 스케쥴을 피하게 된다. 내 신세가 서럽고, 내 나이가 서럽고, 언제까지 이렇게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실존주의가 떠올랐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한 죽음을 직시하라는 게 이런거 아닐까? 내 고름집이 커질지 말지 확률이 50대 50인 것 처럼, 내가 살지 죽을지 확률도 50대 50이다. 죽을지 안 죽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그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고름집 크기가 작아서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은 없다. 그러다 간혹 이물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난 이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기로 했다. 이 고름집은 영원히 살 것 처럼 삶을 사는 나를 깨우쳐주는 장치이다. 그래서 난 이 고름집을 부조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파야 정신을 차린다. 10년 전에 아무렇지 않게 사표를 던졌던 것 처럼, 곧 죽을것처럼 살아보자. 가보자고 부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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