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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하 Oct 06. 2023

‘Grand Open(그랜드 오픈)’의 나라

“어린이한테 너무하잖아! 난 영어 모른단 말이야!”      


딸이 ‘PULL(당기시오)’이라고 적힌 문을 밀고 있길래 당기라고 했더니 외친 말이다. 올해로 여섯 살인 꼬맹이는 영어 단어가 나타나면 화가 난다고 했다. 자기는 영어를 모르는데 생활공간 여기저기에 도배된 영어 때문에 바보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은 사실 한국어 단어의 뜻을 익히는 것도 버거운 상태다. 동화책을 읽어주면 한 권 당 모르는 단어가 10개 이상은 되는 아이로 데굴데굴과 대롱대롱이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는 단계다. 이렇게 미묘한 차이를 하나씩 익혀가는 아이에게 알파벳으로 쓰인 영어 단어가 등장하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이런 일은 잊어버릴 때 즈음 한 번씩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매일 발생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들은 알파벳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한글로 표기된 영어도 6세 어린이에겐 백두대간과 같이 높고 긴 장벽이다. 도넛 가게에 갔을 때의 일이다. 도넛이라는 것이 한국 음식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지만 ‘글레이즈드’라고 써진 도넛을 보면 아이로선 도대체 어떤 맛의 도넛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아이가 손가락을 펼쳐서 저건 무슨 맛이냐고 물어본다. ‘글레이즈드(Glazed)’ 도넛은 설탕 등을 덧바른 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투명한 설탕이 덧발라져 있어 어린이가 보기엔 도무지 그 뜻을 유추할 수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통역사가 된다. 저 빵 위에 설탕이 투명하게 발라져 있다고 아주 달콤할 거라고 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공용어는 한국어인데 딸에게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주고 있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이런 일은 딸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도 언어 때문에 고립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책했다. 내가 영어를 못해서 그런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아니다. 우리는 영어 사용이 세련된 것인 듯 마냥 착각했고 의사소통 고유의 기능을 망각하며 살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언어 때문에 힘든 것은 당신 탓이 아니다.  


일본에 갔더니 여기도 GRAND OPEN이라고 쓰고 있다. 이쯤 되면 고유명사 수준으로 봐줘야 하나.


볼 때마다 황당한 광고 문구가 있다. ‘Grand Open(그랜드 오픈)’이라는 단어다. 새롭게 가게 문을 여는 곳엔 어김없이 ‘Grand Open(그랜드 오픈)‘이 커다랗게 쓰여 있다. 대충 해석해 보면 크게 문을 연다는 뜻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문법에 어긋나는 단어다. ‘Open(오픈)’이라는 단어는 ‘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다. ‘Grand(그랜드)’라는 단어는 형용사로 원대한 등의 뜻이 있다. 그런데 형용사는 동사를 꾸며줄 수가 없다. ‘Grand Open(그랜드 오픈)‘이라는 말 자체가 오류인 것이다. 정확히 쓰자면 ‘Opening(오프닝)’이라는 명사를 써서 ‘Grand Opening(그랜드 오프닝)’이라고 써야 맞다. 뜻도 모르는 틀린 단어를 써놓고도 그 누구도 고치지 않고 그 뜻을 어림짐작하고 있다니 얼마나 한심한 짓인가. 그런데 이것을 아무리 지적해도 사람들은 틀린 것에 익숙하다며 ‘Grand Open(그랜드 오픈)‘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것일까.     

딸에게만큼은 그랜드 오픈과 같은 깨진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우리말로 세상을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아쿠아리움 갈래?”라고 물어봤을 텐데 지금은 “우리 물고기 보러 가지 않을래?, 수족관(水族館)이라고도 하는데 이것도 한자어라서 외우기 힘들지?”라고 말한다. 아쿠아리움에 갈래라고 물어봤을 때 딸은 그게 어디냐고 물어봤지만 물고기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땐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물고기를 보러 어디에 갈 거냐고 말이다. 시장에 가서 볼 것인지 동네 하천에 갈 건지 아니면 바다에 가는지 눈을 똘망똘망 뜨며 묻는다. 그러면 나는 물을 가득 담은 곳에 상어도 있고 돌고래도 있고 펭귄도 있는 곳 아냐고 묻는다. 그렇게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아이의 상상력과 어휘력도 늘어난다. 그렇게 나는 딸과 제대로 소통하고 있음을 느낀다. 


앞으로 나는 계속해서 딸의 통역사가 돼줘야 할지 모른다. 언제 즈음 한국에서 한국어를 통역하는 나의 역할이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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