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들이 말을 시킨다. 뉴욕에 장기체류했던 적이 꽤 있는데 그땐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어린이를 데리고 돌아다니니 여러 사람이 말을 시킨다. 물론, 나 말고 내 옆에 있는 어린이에게 말이다. “오~ 신발이 정말 예쁘다! 무지개 빛인데? 나는 이 신발이 정말 마음에 들어!” 딸에게 통역해 줬더니 수줍게 땡큐라고 한다.
전철을 타면 보통 같이 붙어서 앉을 때도 있고 떨어져 있을 때도 있는데 뉴요커는 딸을 보자마자 바로 말을 건다. “내가 자리를 옮겨주는 걸 원하니? 엄마 옆에 앉고 싶지?” 그럴 때마다 나는 괜찮다고 한다. 어차피 몇 정거장 안 가기 때문이다. 하나 신기했던 것은 전철 탈 때마다 자리 바꿔주겠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철에서도 자리 바꿔주기는 잘해준다. 다만,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어린이가 전철에 앉아 있으면 기를 쓰고 그 자리를 뺏으려는 사람도 많이 만나봤다. 자기가 힘드니 엄마인 나보고 일어나라거나 어린이를 무릎에 올려서 앉으라거나 아니면 어린이의 자리를 마구 침범하면서 자기만 편하게 간다거나. 그런 불쾌한 일이 세 번 타면 한 번은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뉴욕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미국에 가면서 딸에게 라이온킹 뮤지컬을 보여주기로 약속했었다. 드디어 공연 날이 되어 타임스퀘어에 있는 공연장으로 갔다. 라이온킹을 본 후 딸은 흥분했는지 알라딘도 보고 싶다고 아빠에게 며칠간 애교작전을 폈다. 귀여운 딸의 요청에 남편은 티켓박스로 가서 표를 결제했다. 티켓을 손에 쥔 딸은 행복에 겨워 춤을 췄다. 그 모습을 보고 직원이 말을 건다. “오~ 너는 방금 행운을 거머쥐었구나? 언제 공연을 보니?” 그래서 오늘 밤이라고 대답했더니 딸에게 이따 만나자고 한다. 그날 알라딘을 보러 저녁에 갔더니 그 직원이 딸을 기억하는지 다시 말을 건다. “오~ 행운의 주인공이 여기에 왔구나! 다시 만나서 나는 정말 반가워! 내 생각엔 너가 공연을 즐길 준비가 된 것 같아~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렴!” 한국에서 공연을 보러 갔을 때 이만큼 아이에게 말을 건 사람이 있던가? 뒤를 돌아보니 그 직원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말을 걸며 반가워하고 있다. 월급에 어린이에게 잘하는 비용도 포함돼 있을까 궁금할 정도로 친절했다.
한 번은 공연장에 가서 물을 사려고 두리번거린 적이 있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물을 파는 곳이 없단다. 공연 시작이 5분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딸이 너무 목말라했기에 좌절했다. 어디 가서 사 오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이걸 어쩐담. 그때 직원이 말하길,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다나? 저 앞에 가서 왼쪽으로 꺾어서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가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뒤에는 못 알아들어서 일단 호기롭게 물을 찾아 나섰다. 어라? 안 보인다. 그래서 그 근처에 있는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아이에게 말을 또 시킨다. “내가 뉴욕 최고의 물을 소개할게! 너는 이걸 마시고 정말 맛있다고 감탄할 거야! 저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복도 중간 즈음에 가면 물을 마실 수 있단다.” 뉴요커는 정보 하나를 주면서도 말을 참 예쁘게 건넨다는 생각이 든다.
직원들만 친절한 것이 아니다. 하루는 내가 연구하는 문화재를 보기 위해서 아이를 데리고 보스턴에 갔었다. 자료를 신나게 보고 전철역으로 갔더니 기타 연주하는 분이 있었다. 기타 연주를 바로 옆에서 해주시기에 딸에게 1달러를 주고 기타 케이스에 넣고 오라고 했다. 딸이 엄청 수줍어하면서 넣고 도망치듯 나에게 왔다. 기타 연주자는 한 곡을 마친 뒤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몇 살이니? 여섯 살이라고 했더니 엄청나게 부끄러워하면서 왔다 갔다고 그 나이엔 그럴 수 있다며 자기가 더 예쁜 곡을 연주해 주겠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어린이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어린이를 위한 말, 어린이와 소통하기 위한 말보다는 일방적인 가르침을 더 많이 들었다. 추운데 왜 이렇게 입고 돌아다니냐는 훈계(낮 기온이 24도 일 때 이런 말을 듣는다), 앞니가 빠졌다고 깔깔대는 조롱(외모를 가지고 놀리다니 정말 너무하다), 집에 가면 동생 좀 돌보라는 충고(이미 잘 돌보고 있는데) 등 기분 좋은 말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어린이에게 말을 건 어른들은 나에게도 그렇게나 간섭한다. 애를 하나 더 낳으라든지(이미 셋인데...), 요즘은 애 낳으면 돈 많이 준다매라는 단순 호기심이라던지 말이다. 정반대로 내가 그분들한테 집에 가서 며느리한테 좀 잘하세요, 연금은 꽤 나오나요라고 묻는다면 기분이 좋을까.
반대로 뉴요커들은 어린이의 인생에 간섭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 대부분은 어린이에 대한 칭찬, 어린이와 기분 좋게 소통하려는 노력, 조금 더 편하게 해 주려는 배려, 어린이는 아직 배우는 과정이라서 행동이 통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이해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걸 보니 우리 사회가 과도하게 타인을 제어하려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됐다. 어른이 말씀하시면 들어야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하고 배려할 때 어른의 말이 어린이 귀에 와닿지 않을까. 그러니 원치 않은 조언과 충고를 어린이에게 던지기보단 그들을 배려하고 칭찬해 주는 말을 건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