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일본 드라마를 틀어놨다. 지역 오케스트라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집중해서 보지 않다가 어떤 한 장면 때문에 소파에 자리 잡고 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은 성공적인 연주를 끝내고 사람들끼리 오늘 한잔하자고 떠들 때, 한 여성이 시간이 늦었다며 급히 집으로 가는 장면이었다. 아, 내 모습 같네. 일 끝나고 급히 어린이집으로 뛰어가는 뒷모습. 학회 발표 후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다며 당황하며 뛰어가는 뒷모습. 저 여성의 뒷모습이 나랑 닮았다. 그 뒷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이 드라마의 전개를 대충 짐작했다. 그리곤 드라마의 중간 부분에서 이렇게 외쳤다.
“이럴 줄 알았어! 또 일하는 엄마한테 다 뒤집어씌운다니까!”
내용은 이랬다. 비올라 연주자인 미도리 씨에겐 외동딸이 있다. 딸은 대학입시생이었는데 입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런 딸을 엄마가 열심히 뒷받침해줘야 한다며 학교에서도 병원에서도 심지어 남편까지 딸의 부진을 미도리 씨에게 전가한다. 학부모 상담에서 딸의 담임이 지금 오케스트라를 할 때가 아니라고 입시생인 딸을 봐줘야 할 때라고 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입을 씰룩거렸다. 담임 너도 여자면서, 네 딸이 대학 갈 때 너도 학교 휴직하고 입시 봐줄래? 아. 과몰입해버렸다.
드라마는 엄마를 응원하는 딸의 모습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지만 그건 드라마일 뿐. 오늘을 살고 있는 수많은 미도리들은 일 끝나고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가더라도 집안일을 소홀히 한다며 욕을 먹기 일쑤.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이거 올해 방영된 닥터 차정숙에서도 본 장면이다. 딸 이랑이의 입시과정 문제를 엄마인 차정숙 씨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환경 말이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담임과 입시상담을 할 때 자기도 워킹맘이라며 이렇게 늦으시면 어떡하냐고 차정숙을 책망하는 장면이었다. 엄마가 바쁘면 아빠라도 상담시간에 갔어야지. 도대체 여기에서 아빠는 어디 간 거야! 이런 드라마의 특징은 남편이 자기 일은 엄청 대단해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듯 그려진다는 것이다. 미도리의 남편도, 차정숙의 남편도 그랬다. 재밌게도 두 드라마는 모두 2023년에 방영됐다는 것이다. 드라마가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기에 워킹맘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좋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녀 문제에서 미도리 씨가 얼마나 비올라를 잘 연주하는지, 차정숙 씨가 얼마나 환자를 잘 돌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집안일을 척척 다 해내고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드는 의문. 여성이 아이가 잘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해서 자녀를 키워놓으면 그 자녀는 또 자신의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그 자녀 역시 희생하고 다 다음 자녀가 또 희생하고 희생하고 희생하면 도대체 소는 누가 키우는가! 희생이라는 것이 자녀가 잘 되기 위함인데 자꾸 미래를 위해 희생만 하면 결실은 언제, 누가 맺는가?
부모가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자기의 능력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비올라를 연주하는 미도리 씨가 공연이 끝나고 한 잔 하고 들어와도 아이가 밥 잘 먹고 공부하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차정숙 씨가 당직을 서도 아이가 안전한 집에서 잘 자고 다음날 학교에 제시간에 등교할 수 있는 환경이 돼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 사회가 자꾸 엄마를 희생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자녀가 삐뚤어지는 건, 엄마가 일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자꾸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론 드라마에서도 새로운 엄마의 모습을 그려냈으면 한다. 일한다는 이유로 자녀의 입시를 내팽개친 것 같은 이미지는 더는 보고 싶지 않다. 물론 현실에서도 그래야겠지만 말이다.
아, 사회가 변했다는 걸 요즘 느끼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녹색어머니회 활동이다. 예전엔 녹색 어머니 봉사활동을 엄마들만 했는데 요즘은 아빠들이 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그러니 이런 모습들이 미디어에 더 자주 노출됐으면 한다. 우리가 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 말이다. 그래야 기운을 내서 더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아, 그나저나 리버설 오케스트라는 일본 드라마인데 워킹맘에 대한 이야기가 어쩜 그렇게 한국이랑 똑같냐. 희한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