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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하 May 24. 2018

빨간색 루이뷔통 백

“어떻든 그는 자신이 하급자, 부사령관이라고 주장하며 마스크를 쓴 채 익명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그의 말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 말이 제안하는 것을 실현해나가는 공동체의 생각을 표현하기도 한다.” (리베카 솔릿, <<어둠속의 희망>>, p. 119)     


2016년 여름, 총장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간 이화여대 학생들이 모두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는데 옷차림 등의 겉모양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해 찾아보니 본관 점거 중인 여학생들의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며 ‘얼굴 평가’와 ‘몸매 평가’ 등의 여성 혐오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보고 사람들이 갖는 ‘스테레오 타입’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스테레오 타입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집단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는 비교적 고정된 견해와 사고를 말한다.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고정관념이 총장 사퇴 요구 시위에도 반영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화여대 학생들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2017년 9월, 빅뱅 탑과 대마초를 흡연한 혐의로 집행유예를 받은 한서희 씨가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명품으로 치장했다며 일부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았다. 검은색 티셔츠, 검은색 재킷, 검은색 바지를 입은 한 씨의 겉모습은 자숙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러나 가방이 샤넬, 벨트가 구찌라는 명품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날 한 씨는 카메라 앞에 서서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하다고 사과했지만, 그 발언은 명품 속에 묻혀버렸다.      


국정농단 혐의로 최순실 씨가 검찰에 출두할 때도 그녀의 명품 신발이 이슈가 됐고, 학력위조 문제로 파문을 일으킨 신정아 씨가 귀국할 때 입었던 명품 재킷이 이슈가 됐다. 로비스트 린다 김 씨가 법정에 출두했을 때도 그녀의 명품 선글라스가 화제가 됐다.      


언론은 이러한 현상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인물들의 패션에 열광하는 블레임 룩(blame look)'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 블레임 룩‘이라는 현상도 왜 여성에게 많이 발생하는 일인지, 물의를 일으킨 사람에게만 일어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얼마 전,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이용수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 할머니가 승소한 적이 있었고 그 날의 기쁨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했다. 영화의 인기 덕분인지 할머니에 대한 기사는 포털 사이트의 뉴스면 메인 화면을 장식했다. ‘할머니 힘내시라’는 댓글들이 주를 이룬 가운데 내 눈에 띄는 몇 개의 댓글이 있었다.      


“근데 루이뷔통 백 ㅠㅠ”

“루이뷔통 가방이 인상적이다”


생각하지 못한 댓글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나는 빨간색 루이뷔통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사진을 기사에 삽입할 때도 내 눈엔 이용수 할머니만 보였을 뿐 가방은 보이지 않았는데 네티즌들은 그것이 보인 모양이었다. (희한하게도 루이뷔통 백에 대한 댓글은 그 후 모두 지워졌다.)    


가방의 사연은 이랬다. 대학생이 되어 사회에서 학자금을 벌게 된 날이었다. 작은 이모의 소개로 교육열이 높은 동네에서 사회 과목 과외를 하게 됐는데 나의 모습을 보더니 이모는 대번에 한소리를 하셨다.    

  

“사회에서 돈을 벌려면 화장도 해야 하고 가방도 좋은 브랜드로 들어야 해”     


작은 이모는 나에게 화장품 세트와 가방을 사줬다. 이모는 사회생활을 하려면 명품을 들어야 한다며 며칠 뒤 빨간색 루이뷔통 가방을 들고 왔다. 그 뒤로 나는 줄 곳 그 가방만 메고 돌아다녔다. 그렇게 2008년부터 5년을 들고 다니다 보니 익숙해졌고 승소 판결이 난 2012년에도 어깨에 메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닫힌 질문도 있다. 정답이 하나뿐인 질문, 최소한 질문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뿐인 질문이다. (...) 질문 속에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은 우리를 강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목적인 질문이다." (리베카 솔닛,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p.18)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밍크코트를 입고 화려한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은 여성의 삽화가 교과서에 실린 날이 있었다. (삽화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준다는 지적이 일어 현재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패션’이라는 분야에 담긴 스테레오 타입이 여성에게 유난히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여성-패션-명품-사치’라는 가지는 얽히고설키어 마치 다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 맞는. 하나의 사건인 척하면서 우리의 눈을 속이고 있다. 그런 이유로 명품을 든 여자는 사치를 부리는 나쁜 여자로 둔갑했고 언론에 노출될 때마다 지적을 받는 것이 아닐까.     


오늘 다시, 이화여대 학생들이 시위한다면. 그녀들은 다시 마스크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얼굴, 몸매, 손에 들고 있는 아주 사소한 명품까지 사회적 스테레오가 그녀들의 목소리를 없애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또렷이 경청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이 마스크를 쓰고 시위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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