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록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하 Aug 28. 2018

단톡방 꼰대에 대하여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박준(2017), <<운다고 달라지는 이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p.191


글쓰기 수업 합평이 있는 날이었다. 발표자인 나는 학인들이 보는 가운데 덜덜 떨며 내 글을 낭독했다. 발표한 글의 내용은 친정엄마와의 의견 충돌에 관한 글이었다. 원고지 15매의 글을 다 읽자 학인들은 글에 대해 평가하거나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했는데 그 날 나에게 던져진 여러 가지 질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엄마와 대화하는 부분에서 ‘말’이 아니라 왜 ‘문장’이라고 표현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내 글을 살펴보니 ‘엄마가 말했다.’라고 써도 될 부분을 ‘툭툭 내던진 문장’, ‘이 모든 문장’ 등으로 써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왜 이렇게 서술했을까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깨달았다. 나는 엄마와 마주 보고 대화한 것이 아니라 카카오톡으로 대화했기 때문에 그렇게 작문한 것이다. 그 상황이 나도 모르게 ‘문장’이라는 단어로 표현됐나 보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사람과 대면해서 싸우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다. 최근 5년간 엄마와 남편을 빼고 말싸움을 한 것이 한 번뿐인데 그때도 문자 메시지로 싸웠다. 엄마와 말싸움을 할 때도(사실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내가 혼난다.) 남편과 말싸움을 할 때도 (이 때는 남편이 일방적으로 혼난다.) 카카오톡으로 한다. 기억을 더듬어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나는 상대와 대면해서 싸우지 않고 싸이월드 미니홈페이지에서  말싸움을 했다.


이제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데 쓰는 기호는 ‘말’이 아니라 노트북 화면이나 스마트폰 액정의 문자로 대체된 지 오래다. 그래서일까. 말로 들었을 땐 그저 흘러가서 흐릿해졌던 언어들이 이제는 시각으로 들어와서 jpg 파일의 모습으로 좀비처럼 되살아난다. 문제는 개인적인 싸움으로 문장 스트레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00+’ 읽지 않은 카카오톡 메시지가 300+라고 쓰여있을 때면 단체 채팅방에 많은 글이 올라왔구나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취직을 하고 나서도 단체 채팅방에 대한 스트레스가 전혀 없었다. 남편이 “으아~ 개미지옥이야. 나가면 또 초대해!”라고 말할 때도 단톡방 스트레스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읽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그렇게 해보시던지”


단톡방에 올라온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랑 대놓고 싸우겠다는 건가 무서웠다. 100명이 가까운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채팅방에서 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등의 행위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너무 당연한 말을 본인만 안다는 식으로 가르치려는 태도에도 넌더리가 난 상태였다. 그런데 ‘~해보시던지’라는 말투로 글을 올리다니 황당했다. 심지어 채팅방을 나가서 누군가 다시 초대하는 일도 발생했다.

다른 채팅방도 계속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일방적인 지시로 누군가가 도배하고 있었다. 공익적인 일이지만 ‘너는 이걸 안 지키면 나쁜 사람!’, ‘이건 전 인류가 지켜야만 해!’라고 강요하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도 하기 싫었다.


“말과 글의 공통 목적은 공감이다. 우리 교육은 외국과 달리 어려서부터 말하기 능력과 글쓰기 능력을 충분히 길러주지 않는다. 소통 능력 부족은 곧 공감 능력 부족이다. 그러다 보니 높은 자리에 올라 책임과 권한은 커진 반면, 말로써 여러 사람에게 다가가는 능력은 훈련이 안 된 경우가 많다. 대게 말은 많고 가르치려 들기 일쑤다. 그러면서 유머는 없다. 상대 처지를 배려하지 않으니 되래 역효과를 낸다.”
양정철(2018), <<세상을 바꾸는 언어>>, 메디치, p.62


며칠 전, 낙서협동조합 BIGHIP에서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참여하게 됐다. 팟캐스트의 주제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가”였다. 평소에 ‘존중’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편이 아니어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잡히지 않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높이어 귀중하게 대함”이라고 나온다. 이 풀이를 다시 생각해보면 낮춰져 있는 것을 높여 달라 누군가 요청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여 ‘존중해주세요’라고 검색해보니 ‘미혼모를 존중해주세요’, ‘어린이를 존중해주세요’라는 문장들이 상위에 뜬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얼마나 낮추어보고 하찮게 대했으면 가장 위에 링크됐을까 싶었다.


최근, 유명인의 페이스북에 ‘가르치려 들지 마라’는 ‘배우고 싶지 않다’와 같은 말이라며 배우려는 의지가 없으면 무식에서 벗어날 수 없고 무식하면 말도 글도 천박할 수밖에 없다는 글을 보았다. 본인의 글에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댓글에 대한 일침이었다.

나는 이 글이 조금 불편했다. 왜 저 말이 자꾸 신경 쓰였는지는 팟캐스트를 녹음하다 알았다. 본인은 당연히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쓴 글로 내게 읽혔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글에서 매번 배우고자 해야 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그의 글 중에서도 그저 의견의 다름으로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 부분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르치려들지 마라’라고 썼던 사람들은 그에게 매우 무례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은 천박하다는 말은 심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쿨하다. 나는 쿨하다. 나는 쿨하다.


단톡방의 알림을 꺼두어도 공지사항이 혹시 올라와있지는 않은지 한 번씩은 확인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단톡방 꼰대의 글을 읽고 싶지 않아도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처한 상황이다. 대면하여 표정, 몸짓, 음성을 들어야 상대방이 그렇게 표현한 이유도 짐작할 수 있게 되지만 그것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단톡방 문장들을 견디기가 힘들다. 아직 단톡방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를 존중해주며 문장을 던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설픈 거짓말은 반드시 들통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