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다
이른 아침 빈 시립 공원에서 아침 산책을 한 뒤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ouse)를 향해 걸었다. 미테(Mitte)역을 지나치며 20여분간 걸었던 것 같다.
가는 길에 지나쳤던 아이보리빛 아파트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 늘상 보던 아파트와는 달라서 인상 깊었다. 집마다 개방된 베란다 있었는데 저마다 푸른 식물들이 가득했다. 건물 기둥을 담쟁이가 뒤덮고 있기도 했다. 우리나라 아파트는 분양시 기본으로 베란다 확장 시공을 하기 때문에 이런 풍경은 보기 힘든 것 같다.
머리 위로 네마리의 새가 앉아있는 황금 조각상을 지나고 나니 멀리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색감 때문에 눈에 확 띄었다.
머리 위로 네마리의 새가 앉아있는 황금 조각상을 지나고 나니 멀리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색감 때문에 눈에 확 띄었다.
건물 외벽은 검은 타일로 불규칙이게 나뉘어져 있다. 구분된 외벽은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마치 건물 위에 그림을 그려놓은 듯 했다.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는 오스트리아의 예술가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 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가 설계한 것이다. 그의 본명은 원래 프리드리히 스토바서(Friedrich Stowasser)였으나 개명한 것이다. 개명한 이름은 독어로 '평화로움 가득한 곳에 흐르는 백개의 강'을 뜻한다.
개명한 이름에서 그의 사상을 얼핏 엿볼 수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그는 현대건축이 기능성과 실용성에 치우쳐 획일화된 점을 비판했다.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대 건축물은 반듯한 네모 모양에 직선으로 우뚝 솟아있다. 훈데르트 바서는 이런 직선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자연 속에는 올곧은 직선이 없다며 곡선과 울퉁불퉁함을 예찬했다.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 주변의 인도는 굴곡져있다. 보통은 길을 만들 때 자동차나 사람이 편리하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땅을 평평하게 다진다. 보통의 모습과는 다른 비틀린 모양이라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이다.
하지만 자연과 가깝게 보이기 보다는 약간 기괴해보였다. 나무도 풀도 없이 인공적인 구조물 속 심하게 굴곡진 땅의 모양은 좀 거북스러웠다. 단지 익숙하지 않은 탓일까?
훈데르트 바서는 창문의 권리(Window Right)를 주장했는데 제각각 다른 모양의 개성있는 창문을 통해 건축물이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개성이 사라진 시대, 그는 불규칙함과 다양성으로 모든 것들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나보다. 그는 훈데르트 바서의 입주자들이 창문의 크기와 모양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한다. 각기 다른 모양의 창문은 이 집에 실제로 살고있는 이들의 숨결이 깃든 창문인 것이다.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 내부에 들어가보고 싶었으나 일반 관광객들은 입장이 통제되어 있었다. 대신 훈데르트 바서 빌리지에는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다. 빌리지는 여러 상가와 식음료점이 자리잡은 상가였다.
기념품 샵에 들러 화가이자 환경운동가였던 훈데르트 바서의 그림이 담긴 엽서를 몇장 골랐다. 순수한 아이가 그린 듯한 화려한 색감의 그림들이었다. 그의 건축물과도 왠지 느낌이 비슷했다.
실내임에도 군데군데 천장은 뚫려있거나 푸른 잎파리가 무성한 나무들이 들어차있었다. 그는 건물 안쪽에 200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내가 꿈꾸는 집도 자연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는 내가 바라는 집과는 다른 모습인 것 같다. 콘크리트에 물감을 칠한 외관과 곳곳에 붙여진 장식적인 타일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라 보기 힘들었다. 특히 알록달록한 색들은 자연 속에서는 볼 수 없는 조합이었다.
건축물 자체보다는 획일성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추구했던 그의 태도가 더 맘에 들었다. 빈에 오게 되어 비로소 그를 알게 되었다. 현대인의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할까?
'나는 특별하다. 특별한 나를 더욱 더 사랑하자. 그리고 남들과 다름에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