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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NA May 08. 2019

지중해를 품고 있는 요새 에즈(Eze)로 떠나다

오늘의 행선지는 에즈(Eze)다.

여행 중 만난 언니 둘과 함께 떠나기로 했다. 니스에서 에즈 빌리지(Eze village)로 가려면 82번 혹은 112번 버스를 타면 된다. 우리는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82번 버스를 탈 요량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바보같이 트램을 반대로 타버렸다. 심지어 우리는 종점에 도착해서야 이 사실을 알게되었다. 부랴부랴 반대 방향 트램을 탔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10시 40분이었다.

차라리 걸어서 가는게 나을 뻔 했다. 트램 안은 사람이 너무 많았고 지독하게 더웠기 때문이다. 82번 버스를 놓쳐버렸으니 다른 버스를 타야했다. 정류장에서 꽤 오랜시간 기다린 후에 112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버스가 들어와서 타려는데 너도 나도 먼저 타려고 밀치고 부딪히고 흡사 전쟁통 같았다. 그냥 줄을 서서 천천히 순서대로 타면 될 것 같은데 여기는 줄 서는 문화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이 곳만 이랬던 것일까? 우리는 겨우 버스 위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우여곡절 끝에 에즈(Eze)에 도착했다. 에즈에 들어서니 전날 들렀던 생폴드방스가 오버랩 되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잡은 요새는 켜켜히 쌓인 돌로 만들어졌다. 생폴드방스에 갔을 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는데 에즈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여행자가 되어 중세 고성을 거니는 느낌이었다.



에즈는 한 때 로마와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었다. 계속되는 침략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높은 지대에 요새를 만들었다. 여러 문화가 뒤섞여 이렇듯 이국적인 모습을 띄는 것일까? 에즈는 여태 상상해오던 프랑스의 모습이 아니었다.



커다란 나무조각상과 돌담 그리고 초록빛 담쟁이들이 뒤엉킨 에즈 빌리지. 성벽 사이사이 골목길과 오르막 계단 위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나도 그 틈바구니에 껴서 정처없이 걸었다. 이국적인 소품들을 파는 가게들과 갤러리들이 즐비했다. 이것저것 사고싶은 것들이 넘쳐났다.



즐겁게 구경하며 계단을 오르다가 길 끝에 다다르면 신비로운 정원이 나타난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정원 안으로 들어서면 각양각색의 선인장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선인장들은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빛을 받아 뜨겁게 빛났다. 들쭉날쭉한 크기의 선인장들이 불규칙적으로 솟아나있었는데 그 모습이 약간 기괴하기도 했다.



정원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장관이 펼쳐졌다. 가파른 언덕 아래 조그만 집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멀리 보이는 건너편 절벽 위로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도로가 나있었다. 마침내 고지에 올라서니 시야가 탁 트여서 숨을 쉬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렸다.



그리고 지중해! 눈부신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에메랄드빛 물결은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맑아 보였다. 그 옆으로 햇살을 머금은 주홍빛깔 지붕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먼훗날 에즈를 떠올리면 단박에 이 풍경이 떠오를 것 같았다. 어쩜 이리 아름다울까?



우리 모두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카메라에 계속 담고 담아도 사진이 모자른 것 같았다. 한참을 찍고 나서야 멍하니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아름다움을 그대로 어딘가에 담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회가 된다면 혼자가 아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다시 이곳을 찾으리라 다짐해본다.



에즈 꼭대기에 자리잡은 이 정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졌다. 시에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성채에 선인장들을 심어 정원으로 꾸민 것이 시작이다. 지금은 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고 화사해졌다.



곳곳에 놓인 길쭉한 여인 조각상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한껏 돋궈 주었다. 조각상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겠지만 보기에 아름다웠다. 조각마다 생김새가 조금씩 달랐다.



유럽 여행을 되돌아 볼 때면 이 날은 특히 더 머릿속에 떠오른다. 에즈 정원 꼭대기에서 보았던 압도되는 풍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 이 날 나는 극심한 생리통 때문에 힘겹게 여행을 했다. 온 몸에서 열이나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종일 진통제를 먹었다. 짜증이 치솟을 정도로 아프다가도 이국적인 풍경들 앞에 서면 스르르 아픔이 녹아버렸다.



정원을 둘러보고 나와서 우리는 골목골목 다니며 마을을 구경했다. 가난한 배낭여행자는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아도 꾹 참아야했다. 그릇, 찻잔, 가방, 악세사리 등등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많고 많은 것들 중에 심혈을 기울여 딱 하나를 골랐다.



어느 갤러리에 들어가 프린트 된 그림을 하나 샀다. 유화 작품은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었기에 저렴한 프린트 작품을 구입했다. 노을지는 에즈의 모습이 담긴 그림인데 지금까지도 내 곁에 있다. 가끔가다 그림을 바라보면 여행하던 순간이 떠올라 좋더라.



버스 정류장 쪽으로 돌아가는데 마을 주위로 안개가 가득 꼈다. 스멀스멀 빠르게 움직이는 안개 밑으로 아름다운 정원이 보였다. 에즈에 들어서면서도 보았던 정원인데 왠지 값비싼 호텔에 딸린 곳 같았다. 돌고래 조각상이 있는 분수대가 기억에 남는다.



열심히 돌아다녔더니 배가 출출해졌다. 우리는 전망 좋은 어느 식당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크레페 두 개와 모짜렐라 샐러드 하나를 시켜 나누어 먹었다. 나는 사과 주스를 시켰는데 미닛 메이드 사과 맛이 나왔다. 진짜 과일을 착즙한 주스일 줄 알았는데 에잇, 당했다.



이 식당에서 와이파이가 잘 터지길래 보이스톡으로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 목소리만 듣고도 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버렸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혼났다. 순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기차는 연착되고 카드는 블락먹고 생리통까지 겹치니 너무 지쳤다. 의지할 사람도 없도 모든 일들을 내가 선택해야 했고 내가 감당해야 했다.

좋았지만 그만큼 힘들기도 했었기에 특히 기억에 남는 이 날, 에즈를 떠나 니스에 도착해 나는 언니들과 헤어졌고 곧장 숙소에 들어가 긴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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