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밤, 벚꽃이 휘날리는 계절에는 교토 곳곳에서 늦게까지 라이트업 행사를 진행한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느라 많이 지쳐버렸지만 일찍 잠들기에는 너무 아쉬운 하루다. 우리는 숙소에서 휴식을 좀 취하고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도지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연못이 하나 보이는데 반영이 무척 아름다웠다. 조명들은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고 수면 위로 비친 탑과 나무들은 잔잔하게 흔들렸다.
한참을 일렁이는 반영 앞에 서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따라 걷다가 마주친 커다란 벚나무 한 그루.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새하얀 벚꽃잎들이 새카만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우뚝 솟은 5층 목탑은 화려한 금빛으로 반짝였다.
벚꽃이 지기 시작할 무렵이어서 연두빛 잎사귀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푸른 이파리들은 연분홍 꽃잎들과 뒤섞여 밤하늘을 가득 수놓았다.
탑 근처에 서있는 벚나무는 그 세월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다. 아마도 내가 살아온 시간보가 더 오래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도지가 헤이안 시대 796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벚나무의 수령은 족히 몇백년은 될 것 같다.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오랜 세월이 이곳에서 흘렀다. 그 오랜 시간 앞에 나는 서있었다.
커다란 몸집에 제각각 솟아난 가지들은 곧 땅 위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가지 사이사이마다 나무 기둥이 벚나무를 받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 벚나무는 더 커지겠지? 그 때는 더 많은 나무 기둥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큰 벚나무를 뒤로하고 탑에 가까이 다가서면 못 위로 아른거리는 반영을 만날 수 있다. 반영 속에 떠있는 벚나무와 금탑, 물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는 듯 했다.
물 위로 꽃잎들이 흩어져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내려 앉은 것처럼 소복히 꽃잎이 쌓였다. 흐트러트리고 싶을 정도로 물 속 풍경은 고요했다.
우리는 탑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고개가 꺾이도록 올려다 보아도 멀리 보이던 탑, 약 55m 높이에 이르는 목탑이라고 들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웅장했다.
목탑은 노란 조명을 받아서 금빛으로 반짝였다. 낮에는 금빛이 아니라 나무 빛깔을 띄려나? 금빛 목탑 앞은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푸르른 하늘이 반겨주는 맑은 날 이 곳에 다시 찾아오고 싶다. 아마도 지금처럼 반영이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다. 밤은 정적이고 차분한 분위기라면 낮에는 경쾌하고 화사한 분위기일 것 같다.
목탑을 가까이 바라보고 나서 돌아서는 길,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한참을 멀리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고 또 다시 바라보고 그러다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진짜 안녕이다. 벚꽃 휘날리는 계절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도지를 둘러보고 늦은 저녁식사를 하러 교토역으로 향했다. 지하상가를 거닐다가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어느 식당 안으로 쓱 들어갔다. 여행 내내 먹고 싶었던 장어 덮밥과 와규, 모찌리 두부, 따뜻한 도쿠리 하나를 시켰다.
여행에서 관광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음식이다. 맛난 음식을 먹었다면 설사 많은 것들을 보지 못했더라도 즐거웠던 여행으로 기억되더라. 이 날은 아름다운 풍경을 실컷 보고 더불어 맛있는 음식까지 먹었으니 하루가 꽉 채워진 기분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호텔 레스토랑에서 술 한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의 지나간 추억들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늦은 밤이 되었고 은근히 취한 채로 교토에서의 하루가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