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향 은은히 퍼지는 동궁과 월지
비가 흩뿌리던 여름날, 경주로 떠났다.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에 도착한 때는 느즈막한 오후였다.
차에서 내리니 비에 젖은 연꽃 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하고, 연꽃밭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초록잎 사이사이로 싱그러운 연꽃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연잎 위에는 유리 조각처럼 보이는 물방울들이 그렁그렁했다.
연잎을 흔드니 물방울들이 모여 쪼르르 못으로 흘러내렸다.
개구리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연잎을 우산처럼 쓰고다니는 장면을 어디에선가 보았던 것 같다.
연잎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돌기들이 돋아나 있어 물방울이 겉돌며 흘러내린다.
물방울이 흘러내려가며 불순물들을 다 끌고 간다는데 그 덕분인지 연잎들이 매끈하고 깨끗하다.
연꽃이 만발한 시기는 이미 지났어도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의 연밭이었다.
비가 내렸기에 촉촉히 물기를 머금고 있어 흐린 날이었어도 색이 화사하니 선명했다.
연꽃단지를 떠나 경주에서 핫하다는 황리단길을 둘러보고 이리저리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어둠이 내려와 컴컴한 밤이 되었을 때 다시 동궁과 월지(안압지)로 향했다.
여름 휴가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주차와 매표에 한참 시간이 걸렸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뚫고 동궁과 월지에 들어서니 아름다운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낮의 풍경이 도무지 기억나질 않는걸 보니 항상 어둑한 밤에 이곳을 찾아왔었나 보다.
못에 은은히 비치는 반영이 무척 아름다웠다.
흐르지 않는 잔잔한 못이라 그런지 반영이 흔들리지 않고 또렷해 시선을 더 잡아 끌었다 .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라고 불리웠다.
이 이름은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못이라하여 안압지(雁鴨池)라 불렀다는 조선시대 기록에 근거해 붙여졌던 것이다.
이후 복원작업을 통해 발굴된 유물들을 살펴보다가 신라시대에 이곳을 '월지(月池)'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라시대 유적인 만큼 이에 걸맞게 그 시절 불리웠던 이름으로 부르고자 공식 명칭을 바꾼 것 같다.
내게는 더 익숙한 안압지라는 이름,
이제 누군가에게는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테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이름이 바뀌어도
어두운 밤을 밝히는 이 아름다운 모습은 그대로이길...
그냥 가기가 아쉬워 낮에 들렀던 동궁과 월지 옆 연꽃단지를 다시 찾아왔다.
가로등이 곳곳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어 밤인데도 낮처럼 환했다.
기분탓일까? 선선한 밤이 되니 연꽃향이 더 짙게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인도를 밝히는 조그만 등에 신라의 미소가 담겨있다.
그 옆에 소담히 피어난 한여름의 코스모스 꽃.
밤길을 걷다가 스르르 행복한 경주의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