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기술연구소 노브라티 프로젝트] 프롤로그
그것은 2018년 8월의 어느 주말,
지옥의 불가마같은 더위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날 도시의 아스팔트는 폭염에 녹아 죽처럼 진득하게 지글거렸다.
악마에게 할머니가 있다면, 맛있게 끓여 손주 먹였을 뜨겁고 시커먼 죽.
그날은 협동조합롤링다이스의 월례회의 날이었다.
주로 온라인으로 회의를 하고 일을 진행하는 롤링다이스에 있어서,
한 달에 딱 한 번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월례회의는 가장 중요한 안건들을 처리하는 자리다. 즉, 온 도시가 펄펄 끓는 죽 냄비가 되었다고 해서 이 회의가 연기되거나 취소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날, 악마의 할머니가 아스팔트로 죽을 끓이든 말든, 어느 망할 악마가 그 죽을 길에 다 엎질러놓든 말든, 우리는 홍대의 어느 세미나 카페에 기어이 모여 앉았다.
더웠다.
진짜로, 미친 듯이 더웠다.
지하철역에서 카페까지 5분밖에 안 되는 거리였는데도 우리는 이미 모두 더위의 패잔병이었다. 잠깐 사이에 땀범벅이 된 몸은 에어컨 바람 아래서도 쉽사리 식지를 않았다. 손 부채질에, 노트 부채질에, 사방이 어수선해 회의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대신 우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열을 올려 날씨 욕을 했다.
“미쳤어 미쳤어. 날씨가 어쩜 이래.”
“진짜 숨쉬기도 힘들어요.”
“이 더위에 브라 차는 게 제일 짜증나. 사실 이것 때문에 회의 오기도 싫었어요. 집에선 벗고 있으니까 그나마 나은데…. ㅠㅠ ”
“그러게. 이렇게 더울 땐 월례회의도 그냥 화상회의로 하면 안 돼요? 브라 입기 너무 싫어!”
“그렇죠? 이런 무더위에, 브라 너무 싫죠?”
잠시 아우성이 잦아든 틈을 타, 나리씨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나는 그 문제 해결했어요.”
좌중의 눈길이 나리씨에게 쏠렸다.
“지금 저, 브라 안 입은 거예요.”
뭐라고…?
우리의 눈길은 자동으로 단박에 나리씨의 가슴팍에 가 꽂혔다. 노브라의 증거를 찾아 그 위를 빠르게 훑었다. 설리가 곤욕을 치뤘던 바로 그 증거. 있어야 할 것이 거기 있다는 이유로 구설에 오르고 욕을 먹는 일이 되게 만드는 바로 그 증거. 하나나 세 개라면 경천동지를 할 거면서 정상이면 온 세상이 가리라고 숨기라고 화를 내는 그 증거- 뽈록한 두 개의 꼭지 말이다.
나리씨는 얇고 헐렁한 여름 면티를 입고 있었다. 우리의 눈길이 무람하게 방황하는 그 가슴팍 위로 돌출된 요철은 하나도 없었다. 눈길을 잡아챌 꼭지따위 없는 몸 같았다. 그러니까,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브라를 받쳐입은 것처럼 보였다.
“이거, 제가 만든 옷이에요. 브라탑 앞판을 오려서 일반 티셔츠에 꿰매 붙였어.”
“엥?????”
“와 진짜 감쪽같다!”
“너무 자연스러운데!”
“어때요? 편해요?”
“진짜 편해요. 진짜 시원하고.”
나리씨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나도 만들래!”
“어우, 나도! 만드는 법 나중에 카톡으로 보내줘요.”
“완전 일상기술이네 나리씨! 훌륭하다.”
“힝… 나는 바느질 잘 못하는데… 만들어줘요! 플리즈 플리즈 제발류.ㅠㅠ”
좌중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지켜보던 동윤씨가 툭 한 마디 던졌다.
“그거, 프로젝트로 할까요? 아예 제대로 만들어보죠.”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동윤씨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다 좋아하시는데. 제대로 신경써서 만들어보죠. 지금 보니 우리처럼 원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을 거 같고.”
“헐 좋다. 그럼 오늘이 킥오프 미팅인가요?!”
“좋다 좋다! 내년 여름 목표로 오늘부터 착수해보죠 우리.”
“찬성! 이걸 오늘 회의 첫번째 안건으로 부칩시다.”
더위의 패잔병이었던 우리는 어느새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재기발랄해져서,
노브라티 프로젝트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것이 어떤 배움과 수련과 고난, 그리고 희노애락의 역정이 될 줄은 까맣게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