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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바닥 Mar 25. 2021

9일 차, 바람이 불면, 너를 들을게 (퇴고)

신나는 글쓰기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리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너의 목소리는 바람을 닮았어. 어떨 땐 귓가를 부드럽게 스쳐가는 바람 같기도 하고, 어떨 땐 세찬 폭풍우 같기도 하고. 그 목소리엔 항상 너의 영혼이 담겨있었지. 나는 그 영혼을 자랑스러워했고, 또 사랑했어. 



너의 목소리가 몇 년 전에 멈추었는데도 사람들은 너의 목소리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곤 해. 그 목소리는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 아니야. 잔잔하다가도 이내 폭풍우가 되는, 그런 종류의 바람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보게 하는 능력을 가졌잖아.  



오늘은 벚꽃을 보았어. 저게 매화인지 벚꽃인지 헷갈리던 때가 며칠 전인데, 이젠 정말 벚꽃이 핀 것 같아. 벚꽃을 보면 너의 핑크색 머리가 떠오르고, 웃는 얼굴이 떠오르고, 네가 불렀던 경쾌한 노래가 스쳐가고, 어느 봄인가, 여름인가의 환히 빛나던 네가 떠오르네. 



한때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숨이 턱 막혀버릴 때가 있었어. 그 괴로움들이 어느 순간 희석되더라. 그럴 수가 있더라고. 너를 알았던 시간들은 항상 행복했으니까. 행복은 마음 한편,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여러해살이 나무로 우뚝 자라났어.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들이 피고 지고 피고를 반복했지. 그동안 고여있던 괴로움도 녹아 뚝뚝 흘려내려 뿌리에 스며들어 꽃을 자라게 해 주었지. 그래서 그런가? 매년 그 일이 있었던 날 즈음이 되면 잔뜩 가라앉는 기분이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 


네가 없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네가 머무르는 나이에 한발 더 가까워졌지. 시간이 흐르면 잊히는 것들이 있다고 하지만, 또다시 피어나는 기억들도 있어. 네가 남겨둔 언어들과, 모습들처럼. 


삶을 살아가다 문득문득 네 생각이 날 때가 있어. 이제 너의 노래를 들으면 마냥 울적해지지만은 않아. 정말 부드럽구나, 혹은 정말 날카롭구나, 하고 감탄사를 내뱉곤 해. 그럴 땐 네 영혼이 내 옆을 스치는구나, 하며 스쳐가는 너에게 인사를 건넬래. 안녕, 머나먼 길로 여행을 떠난 너는 어떻게 지내니? 


바람이 불면, 가만히 너의 대답을 들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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