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가 단순했던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20대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열받거나 화가나는 식의 스트레스가 뻗쳐 올 때면 먹거나 울거나 잠을 잤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거 같지만 당시에는 딱 그 나이에 맞는 스트레스 였다. 학점이나 연애, 실연, (지금의 스트레스 항목에도 연애와 실연인 것을 보면 죽을 때까지 연애와 실연은 내 삶의 활력소이자 동시에 스트레스 인 듯 싶다) 늘 부족한 용돈 등이 스트레스 였다.
일단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시작했다. 병적인 폭식 수준 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위 속에 음식을 꾹꾹 눌러 단짠 음식을 차곡히 쌓는다는 행위가 주는 위안감이 분명히 있었다. 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짐승 소리를 내며 꺼이꺼이 울다보면 내 울음 소리에 웃겨서 울다가 웃기도 했다. 누가 나를 들여다 보면 멘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소리 내어 울 때의 카타르시스는 취업과 실연, 현실 불만, 미래 불안에 대한 잡다한 생각을 일시적으로 해소해 주는 것만은 분명했다. 소리 내어 울다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들고 다시 일어나서 허한 마음에 음식을 구겨넣는 행위는 분명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비법이자 내가 아는 또래의 여자애들도 나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대 끝자락에 취업을 하고 이직을 하고 퇴사와 진로 변경, 굵직굵직한 연애와 인생에 대한 희망보다 불안이 커져가면서 내 목을 죄는 스트레스의 강도와 깊이도 20대와는 달라졌다. 이제는 나의 삶도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삶에 스트레스가 일부임을 안다. 한 스트레스는 피해야만 하고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밉지만 내가 안고 가야 하는 징글징글한 내 피붙이와도 같은 것이다.
그걸 파악한 다음부터는 스트레스가 나를 잠식하고 일상을 갉아먹게 두지는 않는다. 스트레스그 회피하고 외면하지 않는다. 바로 걷기 명상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스트레스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호르몬 변화처럼,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 없는 내 몸의 노화처럼 당연하게 인식하게 됐다.
스트레스는 호시탐탐 나를 찾아 오기도 하고 나의 기질적인 문제의 탓인지 몰라도 스트레스를 떨쳐 내는 게 아니라 끌어안고 계속 생각의 꼬리를 곱씹어 대면서 스스로 더 한 스트레스르 만들기도 했다.
-그 사람은 왜 나한테 말을 그렇게 했지? 나도 웃으면서 받아치지 말고 싫은 티를 낼걸
-집 주인은 왜 이렇게 쓰레기 분리 수거에 민감해 하면서 세입자들에게 갑질을 해대는 거지? 아 진짜 돈 많이 벌어서 이사를 하든가 해야지
-괜히 엄마한테 짜증을 냈나? 그냥 좀 참을 걸...
결국은 직장인이면서 프리랜서 이면서 더 이상 스트레스 받는다고 먹고 자고 우는 “어린이”의 모습을 보이면서 하루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스트레스를 컨트롤 하기 위해서 나는 스트레스를 저장하고 있다. 언제? 주말에 한강을 걷고 남산에 올라간다. 서울에 둘레길을 오르면서 푼다. 평일에 쌓였던 스트레스 스스로에 대한 좌절과 절망, 타인에 대한 분노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 불만 등등 나를 억누르고 있는 스트레스를 걷는 걸로 푼다.
꾸욱꾸욱 체중을 실어서 걸으면서 햇살과 바람과 내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잡생각들이 사라진다. 현재 이 순간의 행복에 집중하게 된다. 만보가 뭐람? 하루 종일 이만보가 넘는 걸음을 걸으며 꼬리를 물던 생각이 사라지고 몸의 통증에 집중하게 된다. 말이 좋아 걷기지 다리를 시작으로 사지가 팔다리가 저릴 정도로 신체에 노곤함이 찾아올 쯤이면 한 주간 나를 괴롭혔던 크고 작은 스트레스 쯤이야 사치게 가갑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간편한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걷는다. 가끔 걷는게 지루해 지면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기도 한다.
이번 주도 여러 가지 불안과 짜증, 관계에서 오는 오해와 좌절로 적잖은 스트레스를 조금씩 쌓아 두었다. 주말에 열심히 걷고 생각하며 또 머리에 켜켜이 쌓이 스트레스를 긁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