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나는 서울에서 혼자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다. 즉, 더블린으로 1년 이상 떠나야했기에 당시 월세집 계약을 서둘러 마무리 하며 물건들을 다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 이었다.
기껏 해야 7평 원룸에 빌트인 침대와 옷장 정도라 정리할 게 얼마 없을 줄 알았지만 원래 ‘이사’라는 게 그렇듯이 버려야 할 물건들은 끊임없이 나왔다.
애착이 없었던 주방그릇과 더블린으로 가져갈 필요가 없는 비즈니스 정장은 미련없이 버렸다. 아끼고 좋아하던 책은 젤 친한 친구에게 줘버렸다. 족욕기, 전기밥솥, 그리고 취미로 배웠던 우쿨렐레는 지방에 계신 부모님댁으로 보내야 했다.
꼭 필요한 것만 가져가야 했기에 고심했지만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허리께까지 오는 이민가방이 꽉 찰 정도로 짐이 늘었다. 며칠동안 짐을 쌌다 풀었다를 반복하다 말고, 책상 옆에 세워 두었던 라켓에 자꾸만 눈이 갔다. 남을 줘버리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사용 안한 지, 몇 달이 흘러 버린 테니스 라켓에 자꾸 미련이 남았다.
‘갖고 가자. 현지에서 배우지 뭐.’
난 그렇게 꾸역꾸역 라켓을 이민가방에 집어 넣었다. 이렇게 라켓을 갖고 간 이상, 무조건 테니스와의 인연을 놓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천공항에서 체크인을 하는데, 무게가 초과됐다. 추가 금액을 지불하기 아까워서 이민가방에 코를 박고 이것저것 물건을 빼기 시작했다. 몇권의 책과 운동화, 커다란 바디로션까지 빼서 엄마 손에 쥐어주었다.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엄마가 라켓을 가리켰다.
- 저건 뭐하러 가져가노. 니 테니스 치러 가나.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라켓을 빼려는 엄마를 몸으로 막아냈다. 쓸데없이 라켓을 뭐하러 갖고 가냐며 아빠도 함께 잔소리 했지만 오기가 생겼다.
- 거기는 유럽이잖아. 바로 옆에 있는 나라가 영국이고...영국 하면 윔블던 아냐. 아마 한국보다 훨씬 테니스 치기 좋은 환경일거야. 이왕 떠나는 거 평생 스포츠인 테니스 배워 두면 좋잖아. 나는 테니스의 본 고장에서 시작하겠어.
나는 그렇게 외치며 라켓을 둘러메고 더블린으로 떠났다. 늦가을의 아일랜드는 체감 온도가 한국보다 추웠고 하루종일 비바람이 불었다. 늦은 나이에 나보다 열 살 쯤 어린 학생들과 어학원을 다니면서 어울렸다. 가끔씩 트리니티 대학교 도서관에서 틀어박혀서 책을 읽었다. 조용한 연말을 보내고 이듬 해 5월쯤 되어서야 적당한 온도, 낮은 습도, 쾌청한 바람의 삼박자가 갖춰진 날씨가 만끽 할 수 있었다. 트리니티 대학교의 교정을 거닐다가 비어 있는 파란 잔디코트를 우연히 마주했다. 그제야 잊고 있었던 테니스가 떠올랐다. 이제는 정말 ‘유러피언 테니스’를 배워보고 싶은 의지가 불타올랐다.
나는 당시 아일랜드 가정에서 6개월째 홈스테이를 하고 있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께 혹시 도움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을 꺼냈다.
- 내가 서울에서 테니스를 몇 달 배우다가 더블린에 온 거라 여기서도 배워보고 싶은데, 혹시 추천해 줄 만한 클럽이 있을까?
- 어머~테니스? 테니스를 친단 말이야?
나는 잠시 멈칫했다. 테니스를 친다고 말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여기 더블린에서는 주로 상류층 (posh people)이 하는 스포츠가 테니스인데... 멋있다.
엥? 테니스가 상류층 스포츠 였다고? 나는 멋쩍게 웃으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방으로 돌아와서 더블린의 테니스 클럽 레슨을 검색하다가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개인 레슨 비용이 한국의 세 배 쯤으로 비쌌다. 가뜩이나 매달 생활비에, 홈스테이 비용에, 버는 것 없이 한국에서 저축했던 금액을 계속 쓰고 있었기에 너무 부담스러웠다.
‘여기서 굳이 한국에서 몇 배로 돈을 더 줘가며 테니스를 배울 필요 있어?’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왕 영어를 핑계로 외국에 나와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기로 작정했으면 훗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이거 해볼 걸’ 하는 아쉬움은 남기기 싫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테니스 좀 쳤다는 (사실 몇 달 배운게 전부지만) 말을 홈스테이 가족과 어학원의 아이리쉬 선생님에게 말했더니 나와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미묘하게 달라졌다.
여담이지만, 그리고 일반화 할 수 없는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하지만 몇몇의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인종차별을 당한 적이 있었다. 나 뿐만 아니었다. 어학원이나 한인 성당에서 만난 대학생들 중 심하게 인종 차별을 겪고 귀국 비행기를 일찍 앞당겨서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
- 중국인은 꺼져라 (나는 한국인 이라고 외치는 건 소용 없었다)
라고 길거리에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난데없이 양 손으로 눈 주위를 찢으며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추면서 큰 소리로 떠드는 경우도 있었다. 귓 가에 대고 ‘김정은’ 이라고 외치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낯선 환경에서 원치 않게 자꾸만 움츠러 드는 상황이 생겼다. 종종 겪게 되는 인종차별을 견디면서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인가 자문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테니스를 쳤다는 (몇 달의 테니스 레슨이 전부였지만) 얘기 한 번에 나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 서울에서 무슨 회사에 다니다가 더블린에 온 거 라고 했었지?
- 테니스가 취미라니... 너무 부럽다.
- 혹시 수동 운전을 할 줄 알면 언제든 차 써도 되니까 필요하면 말해.
- 우리 딸 한나도 나중에 대학교 가면 한국으로 여행 보내려고. 한국이 IT 강국이라며?
마치 꾀죄죄하게 다니던 우리 팀 부장이 알고 보니까 사장 아들 이었다는 우스갯소리의 주인공 이라도 된 것 같았다.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나이 많은 어학원생의 신분에서 돈을 싸매고 외국에 와서 영어나 배우고 테니스나 치는 한량으로 대접받는 시선을 즐기기로 했다. 샤워 시간, 내 방에 늦게까지 켜 놓는 스탠드 불빛 하나에도 은근한 눈치를 주던 (실제로 많은 아일랜드에서 홈스테이 하는 한국 학생들이 샤워시간으로 스트레스 받는다) 주인 부부의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테니스’ 하나로 신분 상승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결국 레슨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유가 잇는 사치였다. 단, 1:1 레슨이 아닌 그룹레슨을 하기로. 장소는 트리니티 대학교 내에 있는 잔디 코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