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년 동안 홈스테이의 방 한구석에 세워둔 바볼랏 라켓 가방을 드디어 꺼내서 어깨에 둘러맸던 순간의 짜릿함을 잊을 수 없다. 막상 라켓을 손에 쥐고 그립을 이리저리 돌려보니 약 1년 전 서울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무료한 일상을 탈피해 보고자 시작한 테니스... 라켓을 처분하지 못하고 인천 공항 게이트 앞에서 끝까지 사수했던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너무 오랜만 이지만 운전처럼, 수영처럼, 자전거처럼 어느 정도 몸이 기억하겠거니 싶었다.
수업 첫날 이었다. 코트 두 면에 레슨을 받는 사람들이 무려 8명 내외쯤 되었다. 8명을 어떻게 한꺼번에 가르칠 생각인 건지 조금 당황스러웠다. 국적도 나이도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담당 코치는 루마니아에서 아일랜드로 이민 온 전직 선수 출신였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라켓을 처음 잡아보는 사람들 이었다.
우리 모두 코트위에 서서 포핸드, 백핸드 그립을 잡는 것부터 배웠다. 지루했다. 한 시간 동안 제대로 공도 만져 보지 못하고 첫 번째 레슨이 끝났다. 뭐, 처음이야 그렇다 치고 다음 시간부터는 제대로 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두 번 째 레슨도 처음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립 잡는 법을 알려 준 뒤, 8명의 테니스 회원들이 눈치껏 그립을 잡고 스윙을 했다.
한국에서의 테니스 레슨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한국에서의 1회 레슨은 20분에서 30분 사이로 짧았지만 코치님들은 그 짧은 시간 동안 함께 뛰고 땀 흘리며 적재적소에 지적과 시범 동작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몇 배의 수강료를 내고 있는 더블린의 테니스 그룹레슨 스타일에 적잖은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0여분 정도 스윙 연습을 하다가 선생님께서 공을 코트 1개당 공을 두 개씩 주면 우리끼리 알아서 랠리 연습을 하는 식이었다.
말이야 쉽지, 이제 막 그립을 잡아보고 사람들이 선생님이 던져주는 핸드볼을 쳐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서로 랠리를 주고 받는 건 불가능하다. 한 시간 수업 들었다고 랠리를 할 수 있었다면 레슨 따위는 받지 않겠지. 그냥 눈치껏 요령껏
랠리라... 그립을 잡고 가르쳐준대로 스윙을 한다고 상대방과 랠리를 할 수 있다면 테니스에는 레슨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당구처럼, 배드민턴처럼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는 운동이었겠지.
코치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도 우리에게 난타 연습을 하라며 코트 뒤로 빠져있었다.
아니다 다를까. 내가 던진 공, 그리고 상대편에서 날아오는 거의 대부분의 공은 네트에 걸리거나 하늘을 향해 붕 솟았다.
두 번 이상 공을 주고 받지 못하고 계속 공만 주우러 다니는 형국 이었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한국에 있는 친구와 전화로 오랜 수다를 떨었다.
- 더블린에서 테니스 레슨 하고 있는데, 스윙 몇 번 하더니 우리끼리 난타를 해보라면서 30분씩 의미없는 헛스윙을 하지 않나...너무 돈 아깝네.
- 모르냐? 테니스든 골프든 수학이든 영어든 레슨은 한국에서 배워야 하는 거. 꼼꼼하게 첨삭지도 해주는 건 한국 선생님들이 최고야. 더군다나...외국은 테니스 레슨비 엄청 비쌀 걸? 한국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더라. 내 친구도 미국 유학중인데, 한국에 들어 올때마다 테니스 레슨 배우고 다시 학기 시작 하면 미국 가더라고.
- 무슨 테니스 수업에 볼박스도 없어. 공을 쌓아놓고 쳐야 하는거 아냐. 달랑 두 개 준다, 두 개.
- 그냥 레슨비로 맛있는거나 사먹고, 한국와서 다시 배워.
친구는 그 좋은 한국 테니스 코치님들을 놔두고 굳이 더블린에서 테니스 수업을 듣고 있는 나를 탓했다. 난들, 이럴 줄 알았나. 몰랐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지.
후회 가득한 채, 한 달을 채우고, 오기가 생겨서 추가로 한 달을 더 등록했다. 거기 까지였다. 제대로 설명해 주고 그립이며 스윙을 제대로 가르쳐 주거나 교정해 주지 않는 선생님과 나보다도 테니스에 더 초보인 수강생들은 라켓을 휘두르는 시간보다 공을 줍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렇게 딱 두 달, 트리니티 대학교의 물감을 풀어놓은 것만 같은 파란 천연 잔디에서의 테니스 수업은 거기까지 였다.
더할까 말까 망설일 새도 없이, 아일랜드의 코크 라는 작은 남부 소도시에 반 년정도 한국 매니저로 취업이 됐다. 나는 홈스테이를 떠나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사택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아이리쉬 테니스 라이프’의 꿈은 별 볼일 없이 끝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