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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koni May 20. 2021

8. 테린이들과의 만남

2019년 늦가을, 이렇게 몇 년 만에 돌고 돌아 나는 잡았다 놨다 한 라켓을 다시 꼭 붙잡았다. 새로 만난 코치님의 조언을 받아서 250g의 좀 더 가벼운 라켓으로 갈아탔다. 첫 구매한 라켓은 여기저기 끌고 다닌 추억 때문에 버릴 수 없었다. 서브 라켓으로 테니스 가방에 두고 항상 들고 다녔다. 

실내 테니스 볼 머신기를 통해서 15분간 몸을 풀고, 선생님과 랠리를 주고 받았다. 수강한지 12주 정도 지나자 확실히 라켓에 힘이 실리며 공이 세졌다. 정확도도 높아졌다. 테니스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계단식으로 실력이 향상 되는 몸소 느꼈다. 


- 주말에 근처 실외 테니스 코트에서 테니스 클럽 운영하고 있거든요. 나와서 볼 좀 더 치세요. 아카데미 등록 회원들에게는 회비가 없거든요. 

- 아... 근데 제가 이제 겨우 난타가 가능한 수준이라서... 괜히 민폐나 끼치는 게 아닐지...

- 이제 막 시작한, 테린이 분들이 대부분이라 아마 실력은 거의 비슷 할 거에요. 


2019년 12월 어느 일요일, 용기를 내어 테니스 클럽을 찾았다. 코치님에게 자세 교정도 받고, 나보다 실력이 나을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남녀 회원들과 어울리니 인사하면서 긴장을 풀었다. 


- 안녕하세요, A코치님 수업 들으시죠? 

또래 여자가 알은체를 하고 다가왔다. 

- 아-네, 근데...누..구?

- 저도 A코치님 수업 들어요. 제가 오가다가 뵌 거 같아서요 저는 다른데 에서 레슨 추가로 들어요. 클럽 테니스 활동은 이번이 처음이고요.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끝까지 한번 가보고 싶네’ 라고 중얼거렸다. 6명에서 8명의 사람들이 정시에 맞추어 모였다. 이왕 배우기 시작한 거, 끝장을 보고 싶은 단단한 마음으로, 결의에 찬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라켓을 꼭 쥐었다. 

때마침 그날 모인, 테니스 클럽 성비도 남자 4에 여자 4명이었다. 코치님은 남/녀로 코트를 나눠서 일단 테니스 난타 연습을 시켰다. 

와 이럴수가. 코치님하고는 그래도 10번 이상은 서로 주고 받았던 난타가 회원들끼리는 3번을 넘기기 힘들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내가 잘 치는 게 아니라 코치님이 개똥같은 내 볼을 기가 막히게 잘 받아서 내 발 앞에, 내가 치기 편하도록 예쁘게 떨어뜨려 줬다는 것을. 

고만고만 하게 못치는 여자 4명이 있는 코트에서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황송하고 송구하기 그지 없는 민망한 테니스 실력에 맞춰서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기 바빴다. 네트에 걸리거나 하늘을 향해 솟아 버리는 뜬 공 덕분에 우리는 공 주우러 가기에 바빴다. 

아주 미세하게 조금 더 나을 뿐, 트리니티 대학교에서의 테니스 난타 실력과 별로 차이점을 느낄 순 없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나의 마음가짐 이었다. 열심히 공을 줍고, 열심히 스윙을 했다. 헛스윙도 마구 나왔고, 임팩트 순간, 이거다 싶었던 볼도 네트에 걸렸다. 

다시 코치님이 네트 넘어에 자리를 잡고 섰다. 


- 백핸드는 팔 뒤로 너 빼고, 그렇지, 나이스, 나이스

- 라켓 열리지 않게. 끝까지 공을 봐야지. 공 쳐다 봐야지. 

- 발, 스텝스텝. 스플릿 점프 잊지 말고!


건너편에서 외치는 코칭을 이해하면 이해 하는대로, 열심히 셀프 교정을 하며 받아쳤다. 

그렇게 10분 15분만 치면 숨이 목에서 턱 막히고 무릎이 없어진 것처럼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렇게 그 해 겨울, 실내 레슨과는 별개로 너무 얼어서 공이 땅에 잘 튀지도 않는 허름한 클레이 코트를 주말마다 빠지지 않았다. 세 번도 버거웠던 랠리연습이 네 번으로 열 번으로, 스무 번으로 늘었다. 

공울 주우러 가는 횟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이듬해 2월이 되자, 정도 난타가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아직 나같이 민망한 실력으로는 여복 게임을 꿈도 꿀 수 없었다. 옆 코트의 같은 테니스 아카데미에 다니는 남자들은 슬슬 남복 게임을 진행하는 걸 마냥 부럽게만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코치님이 계속되는 난타연습에 지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드디어 입을 뗐다. 

“이제 여자 회원님들도 한 게임 하시죠?”


그래, 이 순간을 위해서, 운동 신경 없는 내가 버텼던 거다. 바로 그 한 게임 좀 해보려고. 나를 포함한 여자 네 명이 쭈뼛 거리며 게임을 하기 위해 네트 한 가운데로 모였다. 

발리는 그립조차 어색하고 감을 잡을 수 없어도, 서브는 아직 배우지도 않아서 흉내조차 내지 못해도 게임은 가능했다. 

서브는 언더 서브로 넣어서 서브 라인 안에만 들어갈 수 있도록, 네 명 모두 엉거주춤 하게 서서 어떻게든 볼을 쳐서 네트만 넘겨서 라인 안쪽에 공이 떨어진다는 자체에 안심하는 게임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지루하기 그지 없었던 게임 이었을지 모르다. 다만, 우리들은 긴장으로 침이 바싹 마르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인생 첫 게임, 여복 경기를 치르고 나자, 테니스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욕심이 생겼다. 테린이 중에서는 잘 치고 싶은, 그리고 그 누구보다 빨리 테렌이 레벨을 벗어나고 싶은 욕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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