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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koni Aug 16. 2022

우리가 어긋나기 시작하던 날

따지고 보면 우리에겐 몇 번의 이상 신호가 있었다. 굳이 글로 남기기에 너무 미미하여 불협화음이라고 볼 수도 없는, 먼지 같은 사건을 제외하고 '이건 아니다'싶은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약 3-4년 전쯤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제주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당시 인생을 삼켜버릴 만큼 엄청나게 피곤한 연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맞다, 말 그대로 연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너무 좋은데 너무 힘든 연애... 사랑이 끝난 후에야 김광석의 노래 가사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바로 그 연애였다. 낯간지럽지만 뭐 정리해 보자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과 비슷했다. 

나와 그 남자의 상황, 그 남자의 집안까지... 나의 처녀작 연애 에세이에 나온 바로 그 남자 때문에 인생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믿고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바로 M이었고 수없이 많은 통화와 메신저로 그녀는 나의 말을 듣고 그녀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의 충고를 나에게 해주었던 것 같다. 

충고든 비난이든 위로든 비판이든 뭐가 됐어도 상관은 없었다. 내 얘기를 하고 나를 충분히 이해하는, 내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여 주는 친구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울고 불고 한참을 얘기하다가 "근데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지... 너는 뭐 어떻게 지내는 거야? 잘 지내?"라는 말을 꺼내면 M은 한결같았다. "물론 잘 지내지... 나야 늘 똑같지 뭐" 그래, 늘 똑같았다. 

우리는 늘 패턴이 그랬다. 항상 인생의 이벤트를 몰고 다니는 쪽은 내 쪽이었고, M의 인생은 늘 평안하고 평온했다. 그래서 재미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본인이 추구하는 안전하고 무탈한 삶을 난 지지 했었으니까 그 반복된 패턴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얼마나 많이 그녀의 근황을 물었던가. 너는 괜찮니, 너는 잘 사니, 너는 별일 없니. 그럴 때마다 늘 내 삶은 별 거 없다며 입을 열지 않는 그녀에게 '그렇다면, 친구야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렴'이라는 자세를 취하며  나는 가래떡을 뽑아내는 기계로 빙의하여 그렇게나 많은 나의 이야기를 쏟아 냈었다.


회사 이야기, 이상한 상사 이야기, 맛집 이야기, 나이 듦에 관하여, 노화에 관하여, 나를 애증의 관계에 놓인 엄마에 관하여...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쏟아내는 동안 그녀는 결코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말 그대로 나는 M의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친구에게 털어놓지 못할 말이 뭐가 있단 말인가. 당시의 나로서는 내가 살인을 했다 해도 그녀에게만은 거짓 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다. 게다가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친구에게 자꾸 신상을 캐묻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이따금씩 야 너는 그렇게 나한테 할 말이 없니... 너는 그렇게 10대도, 20대도, 30대를 관통하는 현재도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 같은 내일을 살아가는 거니... 그렇다면 너에 비해서 나의 삶은 너무나도 롤러코스터구나 비교가 되곤 했었다.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는 그녀의 삶과 성난 바다의 파도를 타야 하는 서버 같은 내 삶... 그 누가 낫다고 우위를 점칠 수는 없었다. 

그 무렵, M의 제주도 출장이 있었고, 내가 그녀의 숙소로 픽업을 가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쌍꺼풀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 너 뭐야. 언제 했어? 

- 몇 달 됐어..


그 순간 가슴이 훅 아래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걸 왜 말을 안 했어?라고 재차 물으면서도 가슴 저 한편에 밀려드는 서운함과 기묘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간단명료하게 터놓는 그녀의 연애 이야기. 이건 뭐 연애 시작했다, 연애 끝났다의 노랫구 만큼이나 짧은 이별 이야기였다. 


- 나 결혼할 사람 있었는데, 상견례까지 앞두고, 남자가 잠수를 타는 바람에 헤어졌어


라고 남일처럼 만나는 친구에게 나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 되물었던 거 같다. 


- 네가? 누구를? 언제? 언제 사귀었다고? 얼마나? 왜? 

그리고 또다시 너무 자존심 상하지만 내가 했던 말은 이거였다. 근데 왜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냐는 울부짖음에 가까운 질책이었다. 


처음 들었던 의문이었다. 우리 친구 맞나? 별 일이 나만 있는 게 아니라 너도 뭔가를 겪고 있었네, 너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끝끝내 나한테는 제대로 입을 열지 않았던 서운함이 피어올랐다. 

서운함을 표해고, 친구는 그래도 '나니까'말하는 거라며 이해를 요구했다. 

나는 이해하기로 했다. 이해하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을 테니까. 아마 그때 '이건 아닌데...'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던 것 같다. 나는 M을 그런 식으로 내 인생에서 놓으면 후회할 것 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그녀를 아꼈던 것 같다. 원래 더 후회할 것 같은 사람이 지게 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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