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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수 Mar 15. 2022

운수 나쁜 곳

다치다/죽다

찔렸다.


찔렸다기보다는 주삿바늘에 긁혔다. 의료폐기물을 치우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시간에 쫓기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만의 일은 아니었다.


욱신거렸다. 긁힌 자국은 꽤 긴 일자의 형태였다. 그러니까, 팔목 안쪽으로 5cm 정도의 선명한 자국이 보였다. 긁힌 부분에 핏방울이 스며 나와 맺히자 그제야 그녀는 긁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이 온 신경을 그쪽으로 자극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자신의 팔목을 긁은 주삿바늘로 향했다. 주삿바늘에 핏물이 묻어 있었다. 원래 묻어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녀의 팔목을 긁으면서 묻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자체의 아픔은 잠시뿐이었다. 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주사기는 도대체 어디에 쓰였던 것일까? 아주 근본적인 물음 같지만, 그건 그녀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를 알려줄 유일한 단서였다.


종합병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다른 의료진에 비하면 너무 열악하게 일했다. 병균과 바이러스 등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곳에서 아무런 보호장구도 갖추지 않고 의료폐기물을 다루었다. 그녀를 보호하는 건 그녀가 산 일회용 마스크와 비닐장갑밖에 없었다. 병원의 핵심은 위생과 청결이지만 그녀에게는 유독 그 위생과 청결이 주어지지 않았다.


"에이즈 같은 거 걸릴까 봐 무섭지. 에이즈뿐이겄어? 병원에는 병이 있는 사람들이 오는 곳인데, 무슨 병에 걸릴지 알 수 없는 게 제일 무섭지. 전염병들도 많잖아. 내가 찔린 주삿바늘이 누구한테 썼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괜히 더 겁나는 거야. 주삿바늘에 찔릴까봐 걱정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돈 벌려고 왔는데 병 걸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그래서 요령껏 하는데, 그게 조심히 한다고 안 찔린다는 보장도 없잖아. 저번에 주사기에 찔린 것도 운이 다 나빴던 거지. 그런데 또 언제 운이 나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이젠 주삿바늘 때문에 노이로제 걸릴 것 같다니까."


베였다.


커터칼날 조각에 베인 것이다. 면장갑을 뚫고 들어온 커터칼날 조각이 손바닥에 박혔다. 이전에도 날카로운 유리조각이나 참치캔 뚜껑에 베이는 일은 다반사였지만, 칼날 조각이 중지와 약지 부근에 박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곧장 칼날을 뽑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너무 깊이 박혀서 잘못 건들었다가는 신경이 상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은 해야 했기에 고민 끝에 박힌 심을 뽑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아픈 것보다 반장의 잔소리가 더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깊이 박힌 건 아니었지만 당연히 피가 났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쓰레기를 처리할 곳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피로 흥건했지만 어찌어찌해서 참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의 면장갑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칼날은 녹슬어 있었다. 그는 파상풍 주사를 맞은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 청소하는 어떤 누구도 파상풍 주사를 맞지 않았다. 감염병과 관련된 주사도 맞지 않았다. 회사도 맞힐 생각이 없었고, 청소노동자들도 맞을 생각이 없었다.


"내 청소 인생에서 그런 적이 전혀 없었는데 오늘 이러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까지 심하게 박힌 적은 없었다는데, 나만 그런 거 보면 내가 정말 재수가 없었던 거야. 올해가 나한테 삼재인 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반장도 그러더만, 당신이 운이 나빴던 거라고. 불운했다고 생각해야지 어쩌겠어? 이거 뭐 따진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일할 때 더 두꺼운 가죽장갑을 껴야 할지 모르겠네. 그래도 그건 이런 칼날은 박히지 않겠지. 여기서는 내가 나를 지킬 수밖에 없어. 그냥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야지."


눌렸다.


눌렸다는 말은 물체를 기준 삼은 것이다. 그의 기준에서는 깔린 것이다. 대학 축제 때 쓰레기터에 쌓아두었던 소주 짝(플라스틱 박스)과 쓰레기 더미에 말이다. 반장과 관리과장이 지시한 대로 아파트 1층 높이의 반만큼 쌓아둔 것이었다. 그게 무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린 더미에 그도 힘없이 넘어져 버렸다.


얼굴부터 고꾸라져서 아스팔트 바닥에 이마를 세게 찧고 말았다. 부딪힌 코도 얼얼했고 입술은 물론 앞니도 바닥에 닿아서 찌릿했다. 입속에는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어이구, 어이구, 하면서 신음을 내뱉었다. 한숨을 힘겹게 쉬며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하필이면 다른 이들은 주점 쪽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고, 주점이 있는 곳은 쓰레기터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이구, 어이구, 신음을 다시 내뱉으면서 그의 등짝을 짓누르는 소주 짝과 쓰레기 더미를 옆으로 세게 던지듯 밀고 간신히 돌아누웠다. 그리고 손을 바닥에 짚고 허리를 들며 일어섰다.


팔이나 다리는 괜찮은 듯했지만, 무릎이 시렸다. 무엇보다 왼볼 쪽이 화상을 입은 듯 따가웠다. 아마도 아스팔트 바닥에 왼볼도 세게 쓸린 것 같았다. 손등으로 얼굴을 슬쩍 만졌더니 빨갛게 피가 묻어 있었다. 거울이 있다면 얼굴이 어떻게 됐는지 보고 싶었다.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서 얼굴을 살펴봤더니 상처투성이였다. 앞니를 살짝 만져보니,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속삭였다.


"휴, 운이 좋았네."


그는 깔려서 다쳤는데도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죽지 않았으니까.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까. 다시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얼굴 까진 것 빼고는 눈도 잘 보이는 것 같고, 귀도 잘 들리는 것 같고, 코로 숨도 잘 쉬어지는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팔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 무릎과 팔꿈치에 약간의 타박상만 있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다고 기도를 올렸다.


이렇듯 같이 일했거나 봤던 청소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이 다치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스스로에게 운이 나빠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 탓은 하지 않았다. 일할 때 회사가 의무적으로 지급했어야 할 보호장구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 줄 것을 알기에 굳이 욕먹을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탓해봐야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 베이고, 깔리고, 미끄러지고, 찔렸을 때 책임자들은 노동자 개인의 부주의를 제일 먼저 입에 올렸다. 죄송하다, 미안하다, 말하면 오히려 그것이 회사나 반장 자신의 귀책사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죄송하고, 미안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쨌든 다친 사람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벌어진 모든 사고에는 징후가 있었지만, 가볍게 무시됐다. 그 징후들은 운으로 치부됐다. 반면에 '운이 좋아' 사고가 나지 않으면 일터는 안전하다고 위장됐다.


노동자는 다치거나 죽는다. 많은 산재의 경우, 노동자에게 운이 나쁘도록 유도하는 '안전하지 않은 일터'에서 비롯된다. 이는 일터가 운의 영역에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을 하면서도 아직 다치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가 단지 '운 좋게'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던 '운명론적 이유' 때문이라면, 언제든 '운 나쁘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가능성도 동시에 존재한다. 하루 일과를 무사히 끝마친 자체를 운이 좋았다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의 의미부여가 이루어지는 일터에서, 노동자들의 '운수 나쁜 날'은 불행히도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한 노동자는 일 시작 전에 매번 이렇게 기도했었다.


"하느님, 오늘 하루도 몸 건강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멘."


비참한 현실이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운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결국엔 그도 다쳤다. 우리는 그 이유를, 그 해법까지도 모두 알고 있다. 단지 비용이란 문제로 현실화되지 않을 뿐이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가 말했을 즈음에, 짓고 있었던 어느 건물이 붕괴됐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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