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쓰임새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월요일..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틀리게 된 건 오후 두시 반 경이었다. 갑자기 회사 건물이 깜깜해졌다. 정전이 되어 전화기, 컴퓨터, 충전기 등의 모든 전자기기가 먹통이 되었다. 얼핏 보면 심각해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내 일은 노트북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배터리도 충분했기 때문에 그닥 불편함은 없었다. 그래도 개중에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었나보다. CEO가 친히 아랫층에 내려와 '남은 일은 집에 가서 하라'는 말을 전달해주었다. 뭐 어쩔 수 있나, 말 들어야지.
은혜로운 CEO의 용단에 감탄하며 회사 밖으로 나오니, 도로 상황이 뭔가 이상했다. 알고 보니 우리 회사 건물만 전기가 먹통인 게 아니라, 주변 구획이 모두 정전된 것이어서 신호등도 전부 깜깜했다. 순간 왕복 육차선인 회사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유턴->좌회전의 3콤보 드라이빙을 신호 없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웬걸. 정체된 도로 위는 여유와 양보가 넘쳐났고, 나의 고난이도 드라이빙은 물 흐르듯 성공한 것이다.
교통 정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한건가 생각을 해보니, 모든 운전자들이 자기 앞에 스탑 싸인이 있다고 생각하며 운전했던 것 같다. 미국에는 도로 곳곳에 STOP이 적힌 표지판이 있는데, 이 스탑 싸인 앞에서는 다른 차나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 없이 무조건 멈춘 후에 갈 길 가야 한다. 다른 방향에 차들이 있으면 천천히 순서대로 갈 길 간다. 오늘의 회사 앞 사거리 교통 상황도 이와 같았다. 고장난 신호등 사이에서 혼란이 아닌 질서를 만들어낸 건, 평소 군말 없이 스탑 싸인을 잘 지키는 미국인들의 운전 습관이었다.
같은 상황이 집앞 미아 사거리에서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양보따윈 없는 대다수의 운전자들, 혹시라도 앞 차가 양보하려 한다면 아낌없이 울려주는 경적 소리,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은 꼬리 물기. 사고라도 안 나면 다행이지. 물론 미국에도 매너 없이 운전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치만 상상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던 오늘의 경험은, 비록 이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건 아닐테지만, 스탑 싸인의 또 다른 쓰임새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