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만원어치 여유
아마 이 글을 이렇게 끝내게 될 것 같다. 결국은 마음가짐의 문제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건 결과보다도 그 과정에 좀더 집중하고 싶은, 혹은 뻔한 결과일지라도 마냥 쉽게 그 곳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일 뿐이다.
다음 달이면 벌써 미국에 온 지 1년이 된다. 으레 그렇듯 이런 기념일 비슷한 게 다가오면 그간의 일상을 돌아보게 되는 법인데, 참 웃기게도 지내왔다. 룸메와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도 '그래도 공부하러 큰 돈 들여 먼 곳 왔는데!' 라는 생각에 휩싸여 육신의 안녕을 제외한 모든 가치를 놓아버렸다. TV? 자동차? 소파? 말도 안된다. 침대, 책상, 식탁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았고, 그 덕분에 우리집 거실은 아직도 휑하다. 마트에서도 소고기 대신에 닭가슴살을 집어 들었던 것은, 비단 다이어트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이 텁텁한 일상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건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여러 모로 계획했던 일이 잘 안풀리고 실패를 겪으면서, 한 구석에서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식의 생각이 싹텄고, 이런 막장같은 요소가 조금씩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여유가 생기니 소비도 좀더 과감해졌는데, 역시나 생존에는 하나도 필요가 없는 것들이 가져다 주는 만족감이나 고양감이나 행복감 같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했다. 퇴근 후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를 들으며 에어컨 앞에서 시원한 맥주를 한 병 들이키면, 그래, 이게 극락이다.
3주쯤 전에 600만원 정도를 들여 중고차를 한 대 샀다. 예전부터 그럴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차를 사고 나니 생활이 눈에 띄게 풍족해졌고 마음가짐에서 여유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출퇴근할 때나 마트에 갈 때, 축구하러 갈 때 누군가에게 차 태워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 건 더 이상 마음의 빚을 만들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좋은 일이 있는 날엔 비싸고 좋은 식재료만 있다는 홀푸드에 차 타고 가서 고급 등심스테이크에 와인을 한병 사들고 와서 저녁을 보내고 나면, 가벼워진 지갑보다도 한결 꽉 채워진 마음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그렇지만 결국은 마음가짐의 문제다. 굳이 이런 생활을 해야만 마음에 여유가 찾아오는 건 아닐 것이다. 굳이 소비하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만족감은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치만 내가 그 정도로 성숙한 사람이 아닌 것을 어쩌겠나. 그래서 오늘도 600만원어치 여유를 화려하게 누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