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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경심 Apr 11. 2021

나를 지킬 수 있어야 아이도 지킬 수 있다

     

 내가 직장상사에게 상처 받은 이유 중 또 하나는 상사가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해도 전혀 받아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뭔가 거슬리는 말을 들어도 내색을 못했고, 누가 봐도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었다. 한마디로 말해 나는 나를 지키는 힘이 전혀 없었다. 나는 남들 앞에서 할 말과 못 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했고, 뭔가 나에게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조금이라도 표현해야 했고, 누가 봐도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는 화를 냈어야 했다. 남이 나를 함부로 대하게 놔두면 안 되는 거였다. 공황장애를 앓은 뒤 나는 인간관계에서 나의 패턴을 깨달았고 그 패턴을 부술 수 있었다.      


 나의 패턴과 맞물려 큰 문제로 나타난 직장상사. 공교롭게도 새로운 직장에서 이전 직장상사와 똑같진 않지만 또 힘든 사람과 일하게 되었다. 이전 같으면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연달아 생길까 하며 신세한탄만 했겠지만 이번에 나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직면했다.


 이 사람은 교묘하게 일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진행시키고 논리가 안 맞는 말을 해가며 자신의 입지를 지켰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웬만한 것은 그녀에게 맞춰주었다.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존중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너무 부당한 상황을 만들려고 할 땐 확실히 표현했다. 특히 공평하게 해야 할 일을 은근히 나에게 몰아주는 그녀의 계략에 일을 똑같이 배분할 수 있도록 표를 만들어 진행했다. 눈으로 대놓고 보이는 공평한 상황에 그녀는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그러자 또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해 가며 나를 자꾸 조여 왔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차분하게 그녀의 논리가 왜 맞지 않는지 설명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들은 그녀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기에 결국 앞 뒤 안 맞는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병원이 바빠지면서 내가 일하는 물리치료실은 인원을 충원했고 그로 인해 바뀐 근무조건과  급여 조건이 맞지 않자 그녀는 결국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녀는 새로 온 직원에게 끊임없이 이 직장이 얼마나 안 좋은지에 대해 설파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의 말에 흔들리는 듯 보이는 새로 온 직원에게 그녀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잡아주어야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날, 그녀는 유난히 예민해져 있었다. 내가 그녀의 말을 한 번에 못 알아 들어서 다시 물어봤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소리쳤다.

 “8번이요, 8번! 귀를 똑바로 열고 있어요!”

  그러더니 덧붙였다.

 “내가 왜 그만두는지 알아요? 허 선생 때문이야! 허 선생! 허 선생은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다는 말에 정말 화가 났다. 여태껏 자신이 원하는 대로 참아주고 따라준 게 누구인데 나에게 할 말인가 싶었다. 나는 지지 않고 받아쳤다.

 “아이고! 선생님만큼 할까요!”

 나의 말에 그녀는 굉장히 불쾌해하면서 하루 종일 입을 닫고 있다가 작별인사도 안 하고 가버렸다. 예전 같으면 나는 분명 그녀에게 굉장히 미안해하면서 사과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후회하고 자괴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 일하는 내내 그녀를 존중했고 배려했다. 그걸 몰라주고 나에게 섭섭해 하는 건 그녀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아친 것은 나에게 소리친 그녀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선생님만큼  할까요!’라고 소리친 것은  지난날 누군가 나에게 공격을 해도 아무 말 못하던 내가 엄청난 성장을 했다는 방증이었다. 나를 지키는 힘이 생겼다는 증거였다.


 그동안 나는 나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도 지켜줄 수 없었다. 우리 아이가 한 달 내내 놀림을 받았다는 걸 알았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같아서는 놀린 아이들 엄마들에게 모두 전화해서 정중히 이야기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아이가 친구를 때렸을 때 전화통화로만 사과할 게 아니라 직접 그 아이와 부모를 찾아가 우리 아이가 보는 앞에서 사과하고 또 우리 아이에게도 사과를 시켰을 것 같다. 그때는 내가 나를 지킬 힘이 전혀 없던 사람이었기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사서 선생님이 내가 빌려가지도 않은 책을 반납하라고 자꾸 그래. 책 없어졌으면 돈 내야 된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들어보니 아이들 사이에서 굉장히 인기 많은 한자를 다룬 만화책 신간이 학교 도서관에 들어왔단다. 그런데 자신은 정말 빌리지 않았는데 자기 이름으로 누군가 빌려갔는지 반납기한 연체가 되고 있어 요즘 책도 빌려보지 못한다고 했다. 아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너 진짜지? 혼날까 봐 거짓말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엄마 믿어도 되는 거지?”

 아이는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고 진실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책을 본 적도 없기에 내용도 전혀 모른다고 했다. 다음 날 학교 도서관에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돌아오는 말은 그저 기록에 우리 아이가 빌려갔다고 되어있다는 거였다. 사실 학교 도서관 시스템이 조금 허술했다. 도서관 학생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름만 이야기하고 책을 빌려가는 형식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 아이 말대로 다른 아이가 우리 아이 이름을 말하고 빌려갔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다시 이야기하자 사서가 말했다.

 “00이가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아이들이랑 돌려보다가 잃어버렸을 수도 있어요. 그걸 잊었을 수도 있죠.”

 세상에나.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책값은 얼마든지 물어줄 수 있다. 그러나 억울한 우리 아이의 심정을 알아주기는커녕 기억을 못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는 사서에게 굉장히 불쾌함을 느꼈다.

 “아니, 저희 아이가 뭐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하는 아이라는 건가요? 그건 아니죠.”

 나의 언성이 높아지니 앉아있던 다른 사서가 일어나 나에게 다시 정중히 설명했다. 어쨌든 이 일은 누군가 그 책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니 기다려보자는 걸로  일단락되었고 나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럼 도서대여 미납은 풀어주세요.”


학교 도서관 사서님에게 우리 아이의 입장을 설명하고 문제를 해결한 것. 이것은 나에게 있어 굉장히 많은 변화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전 같으면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던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나를 지켰던 경험으로 힘을 낼 수 있었다. 모든 건 나로부터 시작이다.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어야 아이도 지킬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언젠가 김미경 강사의 영상을 보다가 혹시 우리 아이가 그때 정말 책을 빌려갔는데 거짓말한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명절에 친척들이 모두 모인 김미경 강사 집에서 돈이 없어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김미경 강사 아들을 의심했다고 한다. 이에 아들은 절대 자신이 가져간 게 아니라며 절규했다고 한다. 김미경 강사는 아들에게 너의 말을 믿는다고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 해도 엄마는 너를 믿는다고 아들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훗날 김미경 강사 아들이 유학 중 편지를 썼는데 사실 그때 돈을 자신이 가져갔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자신이 가져간 게 맞지만 망설임 없이 모두 자신을 의심한 게 너무 싫었다고. 나는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00아, 혹시 너도 김미경 강사님 아들처럼 그런 건 아니지? 그때 사서님이 네가 빌린 걸 잊었을 수도 있을 거라 하더라고.”

 아들이 굉장히 기분 상해하며 말했다.

 “내가 치매야?!”

  답변은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의구심을 떨쳐냈다. 지난날 나를 지키지 못했던 나 그래서 아이도 지키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도 떨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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