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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경심 May 25. 2021

5-3 든든한 나의 편 ‘나’


 그 누구보다 가장 싫어하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는 나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너는 쓸모없는 사람이야.’, ‘네가 그럼 그렇지.’, ‘넌 안 돼. 못 할 거야.’, ‘넌 구제불능이야.’, ‘뼛속까지 잘못됐어.’, ‘너 따위가 엄마라니.’, ‘정말 꼴도 보기 싫어.’

 고등학교 시절엔 내가 너무 싫은 나머지 공책에 나를 꾸짖는 말을 한가득 쓴 적이 있다. 그 비난의 말들은 자그마치 공책 두 장을 꽉꽉 채우고 끝났다.


 나의 이 집요하고 악의적인 내면의 비판자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 나의 부모에게서 온 것이란 걸 알았다. 혹자는 모든 걸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 같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 시절 부모의 양육태도와 환경은 한 사람의 평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나의 내면의 비판자가 하는 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말은 ‘너는 쓸모없는 사람이야.’였다. 언제나 나는 나에게 수치심을 느꼈다. 물론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내면의 비판자가 생긴 건 아닐 테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여덟 살 무렵 엄마의 사촌 동생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나는 그분을 작은 엄마라고 불렀는데 작은엄마에게는 나와 동갑내기 아들이 있었다. 엄마가 종종 작은엄마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나는 엄마가 작은엄마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아빠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었고 작은 엄마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작은엄마네는 일반 주택인 우리 집과 달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파트는 넓고 깨끗했고 고급스러웠다. 당시 작은 엄마네를 보면서 느낀 감정이 위화감이라는 걸 어른이 되어서 알았다.


 나는 워낙 낯가림이 심했기에 또래 친척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저 집에 빨리 가고 싶었지만 엄마와 작은엄마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나는 하릴없이 수박을 먹었다. 친척 아이가 하고 있는 게임 화면을 슬쩍슬쩍 보면서 먹고 또 먹었다. 맛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속이 부대끼기 시작했다. 구토가 올라왔다. 서둘러 엄마에게 말했고 우리는 화장실로 향했다. 수세식 화장실이 익숙하지 않았다. 급하게 세면대에 먹은 수박을 다 쏟아냈다. 기운이 쏙 빠졌다. 엄마는 수박으로 꽉 막힌 세면대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말했다.

 “오늘 엄마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

 엄마에게 창피를 주어서 너무나 미안했다. 속이 안 좋아 힘든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아프든 말든 엄마에게 창피를 주었다는 게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당시 엄마가 아픈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봐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창피했더라도 그건 속으로만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면의 비판자 목소리는 부모의 목소리라고 한다. 사실 부모님에게 들은 내면의 비판자 목소리라고 할 것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 두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가 나에게 창피했다고 했던 말, 그리고 한창 외모에 대해 예민했을 중학교 시절 아빠가 나에게 허벅지가 두껍다고 한 말. 그 외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생각나는 말이 없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까지 내면의 비판자가 활개를 치는 걸까.


 사람은 의사표현을 꼭 말로만 하지 않는다. 사람의 눈빛, 태도, 행동 또한 언어다. 나는 부모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 내가 잘못했을 때 나를 바라보는 눈빛,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끊임없이 내면의 비판자를 키웠던 거였다.


 많은 책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그게 참 힘들었다. 그 이유는 나에게 내면의 비판자가 너무 강력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지독한 내면의 비판자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좋은 부모의 시작은 자기 치유다>를 쓴 비벌리 엔젤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속 비판자를 잠재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마음속 비판자가 하는 말에 그냥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말대답을 하며 반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 보았다.


내면의 비판자 - 넌 배가 나왔어. 어깨도 구부정해. 좀 웃어라. 활짝. 주름 좀 봐.

받아치기 – 내 나이에 이 정도면 괜찮지. 그런 소리 하지 마. 너나 잘해. 난 충분히 괜찮아.      


 책 쓰기를 결심한 그 순간부터 내면의 비판자가 난동을 피웠다.

 ‘너에게는 무리수야. 네가 무슨 책을 쓴다고 그러니?’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야.’

 ‘제발 네 주제를 파악해.’     


 나는 본문을 쓰는 내내 내면의 비판자와 싸우느라 너무 힘들었다. 내면의 비판자에게 저항해보지만 끝끝내 정복당하는 날들이 많았다.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꾸역꾸역 글을 쓰던 어느 날 내면의 비판자가 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책을 쓰겠...”

  내면의 비판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내가 말했다.

 “그만!”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말을 끊도록 소리친 것처럼 내면의 비판자 목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있어!”

 평생을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던 내면의 비판자를 물리친 것이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비벌리 엔젤은 또 이렇게 말한다.     


 건강한 수준의 자기 연민이야말로 마음속 비판자가 내뿜는 독에 대한 직접적인 해독제다. 따뜻하게 달래주는 ‘마음속 돌봐주는 목소리’는 마음속 비판자가 내뿜는 독을 중화시킨다. 부드러움은 잔인함과 거부를 녹여준다. 그러니 자기비판적이 되거나 절망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마음속에서 돌봐주는 목소리를 불러내어 연민과 이해하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연습을 하자.       


 내면아이 치유를 경험하고 그토록 싫어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연민을 느꼈다. 지난날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나는 내 딸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부모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 받고 싶었던 사랑을 나는 내 스스로에게 주기로 했다. 더 이상 부모님에게 내가 원하는 사랑을 갈구하지 않기로 했다. 미래의 나를 ‘마음속 돌봐주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으로 만들기로 했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내가 토닥여 주고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내가 토닥여 준다. 지금의 내가 실수를 한다면 또다시 내면의 비판자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지만 미래의 내가 토닥여주고 보호해 줄 거라고 생각하니 든든했다. 누구보다 든든한 나의 편은 바로 ‘나’였다.      


 나를 내 편으로 생각하고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또 놀라운 경험을 했다. 바지를 입으면 늘 두꺼운 허벅지 때문에 못마땅했다. 결혼 전 보다 10kg이나 살이 찐 지금, 내 허벅지가 꽤 괜찮아 보였다. 마치 평생 끼고 다니던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이제야 또렷이 진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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