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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경심 May 26. 2021

5-4 잘 늙고 싶다

 최근 며칠째 내가 일하는 병원에 물리치료를 오는 할아버지 환자가 있다. 귀가 잘 안 들리셔서 작은 소리는 못 듣는 환자분이신데  그분의 물리치료 처방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물리치료 중에서 환자에게 가장 말을 많이 해야 하는 파라핀 치료가 나왔기 때문이다. 파라핀 치료는 방법을 환자에게 설명해주고 환자 스스로 하는 치료다. 방법은 쉽지만 노인분들 중에는 학습 능력이 많이 저하되어 어려워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한편 알려준 대로 하면 되는데 본인 마음대로 하다가 치료실을 온통 더럽히는 환자들도 꽤 많다. 이런 파라핀 치료를 귀가 잘 안 들린다는 그 할아버지께 큰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잘 알아들으실까 염려했지만 단지 귀가 잘 안 들리실 뿐 내용은 잘 이해하셨다. 무사히 치료를 마친 할아버지는 다음날 또 병원에 오셨다. 할아버지는 파라핀 치료기 앞에 앉으시더니 어떻게 하는지 알려달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어제 하신 대로 하면 된다고 하니 기억을 못 하신다고 했다. 아, 반전이었다.  이해는 잘하시지만 기억이 오래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다시 큰소리로 설명을 해드렸다. 할아버지는 다음날 또 오셨는데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할아버지가 4일째 오신 날,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여쭈었다.

 “할아버지, 치료 방법 기억나세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느린 말투로 대답했다.

  “기억 못 해요.”

 삼일 연속 같은 치료를 했는데 기억을 못 하신다니...  나는 조금 맥이 빠졌지만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드렸다. 내가 다시 설명을 하자 할아버지는 내가 한 말을 스스로 되뇌기도 하고 나에게 질문도 하셨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달리 자꾸 알아듣지 못하셨다. 그러고는 치료 방법을 숙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나는 설명을 포기하고 옆에 앉아 치료를 도와드렸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나 같은 사람은 병원에서 웰컴하지 않겠어요.”

  “아니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알려드린 대로 하려고 노력하시잖아요. 알려줘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떼쓰는 분들이 웰컴이 아니지, 할아버지 같은 분은 웰컴!”

 그러자 할아버지가 껄껄껄 웃으셨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사실 이런 상황이면 답답하고 짜증도 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치료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분의 말투에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을, 태도에서 정중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갑자기 이분이 젊었을 때 어떤 일을 하셨을지 궁금했다.

  “할아버지, 전에는 무슨 일 하셨어요?”

  “치료받으려면 전에 뭐 했는지 그것도 말해야 돼요?”

 할아버지 나름의 유머인 듯했다.

  “아니요, 제가 궁금해서요.”

  “대학 교수.”

  “와, 무슨 과목이요?”

  “제일 무서운 거. 법학.”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할아버지는 대뜸 “미안해요.”라고 하셨다. 자신이 나를 많이 귀찮게 했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할아버지의 말투와 태도에서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전혀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웃으며 치료를 마쳤다.  문득 예전에 일하던 병원에서 치료했던  환자가 떠올랐다. 전직 판사였던 할아버지 환자였는데 권위적인 태도로 늘 대우받고 싶어 하셔서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분의 모습이 법학을 가르치셨다는 전직 교수님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다.

  나이가 들면 습관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들었다. 습관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이라고 쓰여 있다. 나는 습관이란 단지 어떤 행위뿐만이 아니라 생각, 태도, 심지어 무의식까지도 점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직 교수였다는  할아버지 몸에 배어있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과 정중한 태도 또한 습관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잘 늙는다는 건 이런 것이 아닐까. 좋은 습관으로 살아가는 것. 나도 잘 늙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차곡차곡 좋은 습관을 만들어 가야겠다.  내 몸과 마음에 배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좋은 습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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