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 '언어의 정원'

인연은 비를 타고

by 뢰렉신

얼마 전,

잠이 몹시도 안 오는 밤.
'언어의 정원'을 다시 봤다.

비 오는 날이 주는 판타지 같은 애니메이션.
빛의 마술사 신카이 마카토 감독의 46분의 짧은 내용.


남, 녀 주인공들은 비 내리는 날이면,
등굣길, 출근길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분리된 공간에서 만난다.

그들이 만나게 된 공원의 정자 밑은

비로 사방이 차단된 판타지적 공간.


전혀 준비되지 않은 만남.
전혀 인연이 되기 힘든 만남.

모든 관계 속 조건과 신분을 초월하여,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현세 삶 속에서는 판타지 같은 일이다.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면,
초월적 관계 속에서 그런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본 것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을까?


또한 그런 판타지가 일어나는 것에

믿기 힘들어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현실에 관통시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유키노(여주)와 타카오(남주).
내리는 비로 인해 초월적으로 만나지만,
비가 그치면 각자의 주어진 현실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비가 그치지 않으면, 판타지는 이어지겠지만,
결국 비는 언젠가는 그치게 되어있다.
그건 곧 현실에 진입해야 하는 냉정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남의 가치를 현실에 기대지 않고
차단된 판타지 속으로 서로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어떤 부분들을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상한' 부분이 있다.

쉽게 드러나는 것도 있고,
꽁꽁 감춰져 있었지만,
어느 우연한 상황에 알아버리게 되는
그런 부분들 말이다.


그런 이상한 부분들을
거부감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부분을 이해해준다거나, 인정해준다거나,
또는 그런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필요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유키노와 다카오는 결합된 인연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부분이 너무도 이해가 되었다.


시작과 끝.
두 주인공은 詩을 읊어준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 텐데.


<유키노의 詩>




천둥소리가 조금 들리고,
비록 그 비가 내리지 않아도
나는 여기에 남아 있어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면.


<다카오의 詩>



비가 그쳐도,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는 것.

그것은 판타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개인적으로 비 오는 날,
내리는 비를 보는 게 너무 좋다.
추적추적하니 내리는 비를 보면,
성급하고 산만한 나를 단단히 눌러
납작하게 만들어 준다.

납작해질 대로 납작해진 나는,
자꾸 되돌아본다.
시간을 되돌아 보고, 나를 되돌아 보고,
결국 살아온 시간 속에 나를 얹어서 되돌아본다.

'나.. 잘 살고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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