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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뢰렉신 Jun 01. 2018

연애의 목적과 이별의 목적

그렇게 낯선 사람을 만나 사랑과 이별을 한다.


연애하고 이별하는 패턴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몇 차례씩 겪어야하는 인간관계의 룰 중 하나이다. 가장 찬란했던 시기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로 곤두박질 칠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패턴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연애를 하는 것과 이별을 하는 것 모두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실행 된다. 그냥 실행되는 경우는 없다. 보편적으로 그 목적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내 경험을 되짚어  글로 써보기로 했다.

우선 거꾸로 '이별의 목적'부터 찾아보자.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이별을 하는가?


누군가와 이별하는 것은 매번 겪을 때마다 너무 힘들다. 공기와 같이 늘 당연한 사람이었고 나를 떠날 것이라는 상상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과의 이별이라면 더더욱이다.

이것은 마치,
온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두려움에 빠져 눈을 뜨고 숨 쉬는 매 순간이 악몽이고 숨 막히듯 죄어오는 지옥 같은 현실에 빠져버려

자는 게 자는 게 아닌,
먹는 게 먹는 게 아닌,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죽음보다 더 심한 무기력감에 빠져버린다.


그런 치명적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뭇 연인들이 결국 실행하고 마는 이별의 목적은 무엇일까?


물론 각기 다른 세세한 이유와 상황을 가지고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퉁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이별을 생각하고 실행한다.


다른 삶, 다른 일상에 대한 갈망.

즉, 지금 처해있는 현실보다 좀 더 나은 삶과 좀 더 나은 일상을 영위하고 싶은 갈망에 대한 본능적 실천이다.

이는,
>연인이 바람을 피웠건,
>연인의 밑바닥 성격을 보았던,
>연인의 소홀한 애정에 실망했던,
>연인의 스펙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든,
>연인보다 더 나은 이성과 사랑에 빠졌든,
그 외 등등.

이렇게 각기 다양한 상황에 입각하여 본인의 삶과 일상이 지금의 현실보다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별을 생각한다.

물론 자기 보호에 대한 본능을 비롯해 자기 삶의 애착에 대한 이기적 본능도 깔려 있다.



내가 겪었던 이별 이야기


나는 이별이 무서워 연애를 시작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5년간의 긴 연애 끝에 마주한 이별은 내겐 너무나 치명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 다시 연애를 시작하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치 건드리면 안 되는 벌집을 멀리 돌아가듯이 그렇게 오랜 기간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벌에 쏘인 아픔을 알기 때문에 결국 그 안의 꿀의 맛을 잊어버리게 되더라.


5년의 연애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와의 이별을 생각, 아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내 몸과 정신의 일부처럼 여긴 사람이었다. 그런데 분명 그날 아침 전화에 사랑한다 했던 사람이 저녁 통화에서 헤어져달라고 울며 부탁했다.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그녀의 심리가 어떻게 극과 극으로 변했던 것일까? 내 상식으로는 절대 납득이 안되었기 때문에 몇 날 며칠 아니 한 달 이상을 매달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더욱더 매정 해지는 그녀의 말투와 눈빛이었다.

5년의 연애 기간 중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낯선 말투와 목소리, 그리고 낯선 눈빛.


나는 그제야 서서히 포기를 선택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녀의 친구에게서 이별의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이별을 준비해왔더란다. 아직 학생이고 철없던 나에게 미래를 볼 수 없었더란다.

같이 있을 때 즐거운 날은 그래도 오랜 정이 있는데 계속 만나야지 하고 마음을 다스렸다가, 내 찌찔함을 발견한 어떤 날은 자신의 미래를 함께할 사람으로 적합한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하루하루 마음이 변했더란다.

그 시소 같은 마음의 기울기가 결국 한쪽으로 완전히 기운 날이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바보같이 절대 눈치를 못 챘었다. 천진하게 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쓰다듬었을 뿐.


실연을 당하는 것이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말로만 들었던 식음을 전폐한다라는 이야기를 그때 경험하게 되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아니 세상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싶다는 끝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그동안 그녀에게 했던 내 말과 행동에 대해 무한 리와인드해서 분석도 했었다.

그러다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하자 조금씩 이별의 허망함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이별이란 무딘 칼을 조금씩 조금씩 날카롭게 갈아 만든 뒤, 나와의 인연의 끈을 단칼에 잘라내 버렸다는 생각에, 어떻게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지! 하는 분노와 격정의 서운함에 몸부림이 쳐지더라.


진짜 나중에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보다 못한 우리 어머니가 그녀에게 전화까지 했더란다.


"얘, 우리 아이랑 다시 잘 해볼 수 없겠니?

"죄송해요 어머니..."


어머니가 낳으시고 키워내신 아들 녀석이 그렇게 삶을 포기하려 할 정도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처음 보셨나 보다. 걱정이 되셨겠지. 저러다가 당신 아들이 잘못되는 줄 아시고 얼마나 고민 고민하시다가 어렵게 전화를 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나는 불효를 참 여러 가지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인간을 무너지게 하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이,


그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
그리고는 사라지는 것


 그대로 5년간 내 정신, 내 몸같이 해왔던 연애 끝에 온 이별은 내 세계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와 께 했던 일상의 모든 것들, 주말이면 늘 패턴처럼 가던 장소, 한 달에 두세 번은 항상 먹었던 음식 등, 둘만이 알던 일상의 즐거움들을 더 이상 같이 할 수 없다는 허탈감.

내 일상의 모든 기준을 그녀와 함께 하는 것으로 맞추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것은 바로 내 삶 전체의 흐름이 깨져버린 것과 같았다.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그녀를 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내 삶이 최악의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 다시는 회복해 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이별은 다양한 방법으로 극복되더라.


생뚱맞게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여기서 꺼내 미안한데, 이별 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니 영영 붙어버릴 수 없이 미세한 파편처럼 쪼개져버린 내 인생의 삼라만상이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다시 붙는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더라.

그때 느꼈다. 아! 우주의 모든 것에는 제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질서가 있나 보다! 인간이 허투루 만들어진 만물의 영장(靈長)이 아니었어!

 

조물주께서는 인간에게 어떠한 슬픔이나 좌절이 오더라도 시간 흐름환경 변화를 섞어 만들어낸 '망각'이라는 마법으로 극복해 낼 수 있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만들어 주셨구나.

그 마법의 힘이 지구에서 나외에 모든 사람들이 나가줬으면 했던 그 엄청난 고독감과 우울을 이겨내게 하더라. 역시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본능이 더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빈껍데기 같이 이리저리 영혼 없이 굴러다니던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라는 각성이 들고, 더 잘 살아내어야겠다는 삶의 동기부여가 스스로가 파놓고 들어간 암흑의 구덩이에서 나를 끄집어내더라.

그리고 '이렇게 힘든' 이별을 경험해봤으니 앞으로는 좀 더 대비하고 수월하게 이별해 낼 수 있을 거야 하는 알 수 없는 마음의 위안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도 나름 큰 경험치라고 내 인격의 레벨이 올라가는 것을 느끼게 될 줄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픈 이야기이다. 그러나 좀 더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인생은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연속이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이치인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과 이별을 하지 않는가. 부모, 가족, 연인,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오늘'이라는 시간과 '여기'이라는 공간과도 끊임없이 이별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에 대한 관대함을 가져야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인간의 숙명이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누구나 이별을 하고 누구나 다시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삶의 힌트로 생각해야 한다.

주변에 마냥 행복해 보이는 연인들도 몇 번의 이별의 과정을 거쳐 조율된 정신과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 사람들일 것이리라.

그렇게 다시 쟁취한 사랑은 이전보다 좀 더 조심스럽겠지만, 좀 더 성숙해진 것일 테고, 그래서 이전보다 더 뜨겁고 행복한 연애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연애의 목적은 무엇인가?


‘연애의 목적’이란 영화가 있다. 응큼한 박해일과 성형 전(?)의 귀여운 강혜정이 주인공이었던 그 영화. 남자 입장에서는 뇌 주름 깊은 곳에 감춰진 응큼한 생각들을 핀셋으로 끄집어낸 것 같아 조금 민망하고 불쾌(?) 했던 영화로 기억에 남아있다. 영화 포스터를 보면 예상 되듯이 남자 주인공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연애의 목적'은 sex, 즉 본능적 쾌락이다.  


영화처럼 사람들이 행하는 연애의 특정한(?) 목적들은 제 각각이겠지만, 내가 그간 치러야 했던 연애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연애를 하면서 뚜렷한 목적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그 목적을 되짚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뭔가 하나의 단편적 목적만은 아니었을 텐데, 그 여러 가지 목적들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결국 내가 생각해낸 ‘보편’적인 연애의 목적은


일상 속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벤트들을
가장 가깝게, 가장 솔직하게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  


이라는 것이 그 보편적 의도이지 않나 싶다.

더불어 이성(異性) 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동성이나 가족과는 같이 할 수 없는(‘아니하기 힘든’이 맞겠다) 性과 관련된 이벤트까지 같이 할 수 있는 대상이니까  



다시 연애의 목적을 찾아 연애를 시작하다.


남들은 이별의 극복에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시 연애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렇게 쉽게 시도해보지 못했다. 내 잠재의식 속에서 그녀와 일말의 재회(再會) 가능성을 꿈꾸며 나를 가둬놓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연애를 쉽게 시작하지 못했고 칠갑 팔갑으로 겹겹이 마음의 경계벽을 세우고 사람들을 대했다.

항상 내가 정해놓은 선을 유지하는 긴장감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과의 친밀감 조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주변 사람들도 서서히 눈치채기 시작하더니 겉으로는 친해져도 속까지 깊게 친해질 수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갔다.


그 후, 오랫동안 속까지 깊게 친해지는 사람을 만들지 못했다. 내가 마음을 열지 않으니 주변에 사람이 다가와도 인연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그렇게 주변에서 소개를 해준다고 하고 또 좀 적극적인 성향의 이성들이 대시를 해와도 나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인연의 진전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들어간 직장에서 타 부서 사람 한 명을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에게서 이전 이별했던 여자 친구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얼굴이 닮았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풍기는 이미지가 닮았다.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둘을 비교해보면 어디가 닮았는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뭔가 말로 형언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풍기는 아우라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나름대로 결론 내린 것이지만 나와 본능적으로 깊은 인연으로 발전될 사람이란 것을 '닮았다'라는 관념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외모나 성격이 닮은 건 아니었으니까.


여하튼 처음 본 사람에게 말을 잘 걸지 못하는 나는,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덥석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버렸다.


제 예전 여자 친구와 무척 닮으셨어요.


헐.. 무척 실례스러운 말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 말을 던져버리고 말았고, 멋쩍어하는 그녀와는 그걸로 더 이상의 인연의 진척은 없었다.

그 후 나는 몇 번에 이직을 했는데 세 번째로 재 취업한 작은 회사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랫동안 닫혀버린 내 마음을 여는 인연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작은 회사여서 얼마간 같이 부대끼며 생활해 보니 까칠하고 드세보이는 그녀의 성격이 영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몇 개월 지난 시점에 나는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그녀와 조우하고 말았다. 서로 깜짝 놀라면서 '집이 이 근처세요?'라는 물음에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녀는 우리 동네에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후 출퇴근 길에 우리는 종종 지하철에서 마주쳤다. 나는 그게 좀 불편해서 일부러 그녀가 타는 시간을 피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주로 타는 지하철 칸에는 타지 않는 습관을 들였다. 그러나 그렇게 피한다 해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지하철에서 어색하게 마주치게 돼 강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진짜 처음에 그냥 대화만 나누었을 뿐이었다. 말이 끊기면 너무 어색함을 느꼈기 때문에 날씨 이야기나 어제 봤던 tv 프로그램 이야기, 회사 업무에 대한 이야기 등등 서로 대화가 끊기지 않게 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지만 그래도 나는 출발하는 동네 역에서 그녀가 타는 칸에는 일부러 타지 않았고, 회사 근처 환승하는 역에 내려서야 마주치게 하여 같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짧게 조절하였다. 그 정도로 누군가가 내가 정해놓은 친밀함의 선을 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2년이 지나니, 나는 결국 그녀가 타는 같은 칸에 타기 시작했고 3년째 부터는 서로 기다렸다가 퇴근도 같이 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서로 쭈뼛쭈뼛 주말에 뭐해?라고 물어보며 주말에도 간간히 만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기하게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새롭고 다채로운 일상의 대화가 너무 즐거웠고, 같이 있으면 둘만이 알고 있는 장난스런 행동과 말투로 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같이 있으면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1개월도, 1년도 아닌 무려 3년이나 이어진 일관된 우리의 일상이 너무 즐겁고 편했다. 그렇게 개인주의적 성향을 풀풀 풍기면서 깊은 인연만큼은 허락하지 않고 철벽으로 버티던 나에게 하루하루 일상의 정이 얇게 얇게 쌓여 결국 쉽게 찢어질 수 없는 두꺼운 영어사전 같은 인연으로 그녀와 나는 포개지고 말았다.


하루는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내가 왜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버렸을까?


그녀와 3년을 매일 만나며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눈 끝에 내가 알아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친구는 나와 많이 닮았다.

라는 것이었다.


외모가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음.. 뭐랄까? 생각이 닮았다라고나 할까? 상식이 비슷하다고나 할까? 같이 있으면 서로 뭔가 어긋나는 것이 별로 없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편하고 안정되게 만드는지 모른다.

기분이나 행동이 예측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녀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싫은 부분을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좋은 거 싫은 거에 대한 기준의 오차가 서로 크지 않기 때문에 눈치 보면서 뭔가 어색하게 행동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들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은 서로 솔직하게 꺼내놓고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대척이 되는 부분들이 있지만, 

그걸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상식으로 접수해 다시 각자의 상식 안에 넣어 묶어버리고 만다. 이로서 우리 각자의 상식은 좀 더 넓어졌지만 더 비슷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한 서로의 '소통과 신뢰'가 쌓이기 시작하니까. 이 사람 앞에서는 뭔가를 숨기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 없더라. 그렇게 마음을 열게 되니까 이제 다시 연애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 이별할 때, 평생 내가 가진 모든 감정을 다 써버려 누군가에게 또 이토록 애정 어린 감정이 다시 생겨날까? 앞으로는 밋밋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애정 질량 보존의 법칙'이란 걸까?


시간이 흘러버리고 주변이 변해버리니,

그대로 다시 생겨나버렸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감정이 :)






Epilogue

이제는 어느덧 흔해진 연애와 이별


그 후, 나는 몇 번의 이별과 몇 번의 연애를 더 겪어내었다.

이별은 매번 힘들지만, 또 그렇게 '시간'이란 회복제가 조금씩 조끔씩 그 힘듦을 가져가 버려 결국 원래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고 내 관점에서 좀더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법을 알게되어 다시 얻어낼 사랑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거듭된 이별을 통해 느낀 것은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동력은 꼭 또다시 생겨난다라는 확실한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좀더 만남과 이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상쇄시켜낼 수 있었다.


'사랑'이란 것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못한 감정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사람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어쨋거나 결국 불행을 준다해도 그 불행까지도 행운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또 낯선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또다시 낯선 사람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반복하겠지.


영원할 순 없어도,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는 그 낯선 사람을 다시 만나길 기대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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