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도하 이연구 변호사
상법상의 모든 회사는 상행위나 그 밖의 영리를 목적으로 하여 설립된 법인이다(상법 제169조). 법인이란 자연인(사람)이 아니면서 법률에 의하여 권리능력이 인정된 단체를 말한다. 법인의 주요한 성질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법인 명의로 권리·의무의 주체가 된다. 둘째, 법인의 명의로 소송당사자가 된다. 셋째, 법인의 채권자에 대하여는 원칙적으로 법인 자체의 재산만이 책임재산이 된다. 그런데 주식회사와 유한회사의 경우에는 위의 모든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합명·합자회사의 경우에는 사원이 회사채권자에 대하여 직접 책임을 지기 때문에 셋째의 성질이 없다. 이와 같이 회사는 모두 법인이지만 법인성의 정도는 회사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우리 상법은 회사를 모두 법인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회사를 법인으로 할 것인지의 여부는 입법정책에 관한 문제로서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 및 프랑스 등은 합명회사와 합자회사 등 인적회사도 법인격을 인정하고 있지만, 독일과 미국 등에서는 물적회사에 대하여만 법인격을 인정하고 있다.
한편 회사에 대하여 구성원인 사원과 별개의 독립된 법인격을 인정한 것은 회사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기능을 수행할 것을 예정하여 창안된 법적 기술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법인격이 완전히 형태(껍데기)에 불과하거나 법의 적용을 회피하기 위하여 남용되는 경우에는 법인격이 부인될 수도 있는데, 이를 법인격부인의 법리라고 한다.
회사에 대하여 그 구성원인 사원(주주)과 별개의 독립된 법인격을 인정한 취지는 회사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기능을 수행할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법인격부인론이란 회사의 법인격이 본래의 입법취지와는 달리 남용되는 경우에 회사의 특정한 법률관계에 한하여 법인격을 부인하고 그 법인의 배후에 있는 실체에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이론이다. 법인격부인론을 인정하는 취지는 회사의 독립된 법인격과 주주유한책임의 원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에 정의와 형평에 반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회사가 외형상으로는 법인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법인의 형태를 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고,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그 법인격의 배후에 있는 사람의 개인기업에 불과하거나, 그것이 배후자에 대한 법률적용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함부로 이용되는 경우에는, 비록 외견상으로는 회사의 행위라고 할지라도 회사와 그 배후자가 별개의 인격체임을 내세워 회사에게만 그로 인한 법적 효과가 귀속됨을 주장하면서 배후자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되는 법인격의 남용으로서 심히 정의와 형평에 반하여 허용될 수 없고, 따라서 회사는 물론 그 배후자인 타인에 대하여도 회사의 행위에 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2007다90982).
법인격부인론이 적용될 수 있는 전형적인 예는 1인회사와 같이 법인격을 가진 회사가 배후의 사원(또는 주주)으로부터 독립한 실체를 가지지 못한 경우에 회사와 특정 제3자간의 문제된 법률관계에 한정하여 예외적으로 회사의 법인격을 부인하고 회사와 사원을 동일시하여 그 사원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원래 회사의 법인격남용에 대한 규제방법에는 회사의 설립요건강화나 설립무효·취소 등의 입법적 조치와 회사의 해산명령(상법 제176조)·해산판결(상법 제241조, 제520조) 등 회사의 법인격을 전면적으로 소멸시키는 제도가 있다. 이에 대하여 법인격부인론은 법인격의 유지를 전제로 하면서, 회사의 특정한 법률관계에 한하여 법인격을 부인하는 것이다.
법인격부인론에 관하여는 실정법상의 규정이 없으므로, 우리나라의 다수설과 판례는 민법 제2조 제1항의 신의성실의 원칙 위반이나, 민법 제2조 제2항의 권리남용금지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이에 대하여 상법 제169조에 규정된 회사의 법인격은 법이 정책적으로 인정한 것이므로 그 목적에 반하여 악용된 경우에는 법인격을 부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여 법인격에 내재하는 한계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견해(정찬형)도 있다.
생각건대 두 견해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그러나 상법 제169조는 회사의 법률관계를 명확하게 획일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법기술적인 규정이므로 이를 법인격부인의 근거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법이 회사에 대하여 법인격을 부여한 것은 회사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기능을 하도록 하려는 취지인데, 회사의 법인격을 위법 또는 부당한 목적으로 남용하는 것은 그 취지를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법인격이 남용된 경우에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하거나 권리남용에 해당하면 그 한도에서 법인격을 부인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수설과 판례는 법인격부인의 적용요건으로 법인격의 형해화와 법인격의 남용을 들고 있다. 법인격의 형해화란 회사가 외형상으로는 법인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법인의 형태를 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고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그 법인격의 배후에 있는 사람의 개인기업 또는 모회사의 영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법인격의 남용이란 회사가 배후자에 대한 법적용을 회피하거나 채무면탈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함부로 이용되는 경우를 말한다(대법원 2008.9.11. 선고 2007다90982 판결).
법인격의 형해화를 인정하기 위한 판단기준은 원칙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법률행위나 사실행위를 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지배주주의 회사지배가 완전한지 여부, 회사와 배후자 사이에 재산과 업무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혼용되었는지 여부, 회사 자본금의 부실 정도 등의 요건에 비추어 볼 때, 회사가 이름뿐이고 실질적으로는 개인영업에 지나지 않는 상태 등이다. 회사가 그 자체의 독자적인 의사를 상실하고 지배주주가 자신의 사업의 일부로서 회사를 운영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지배력을 행사함으로써 법인으로서의 존재의의를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 요구된다. 단순히 주주가 회사의 주식 전부를 소유하고 있다거나 모회사와 자회사 사이에 임원의 겸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법인격의 형해화라고 할 수 없다. 또한 회사의 재산과 업무 등이 지배주주의 그것과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고 양자가 서로 혼용되어 있어야 한다. 지배주주의 회사에 대한 완전한 지배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회사와 배후자의 재산이 명확히 구분된다면 회사채권자의 책임재산 파악에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법인격부인론은 회사로부터 변제를 받지 못한 채권자를 구제하기 위한 제도이므로 위의 요건 외에 회사의 자본금이 과소한 경우에 적용된다.
그리고 법인격의 남용을 인정하기 위한 판단기준은 법인격이 형해화될 정도에 이르지 않더라도 채무면탈 등의 남용행위를 한 시점에서, 회사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회사를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지배적 지위에 있고, 그 지위를 이용하여 법인 제도를 남용하였는지 여부이며, 그 남용 여부는 법인격 형해화의 정도 및 거래상대방의 인식이나 신뢰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기존회사가 채무를 면탈하기 위하여 기업의 형태·내용이 실질적으로 동일한 신설회사를 설립하였다면, 신설회사의 설립은 기존회사의 채무면탈이라는 위법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회사제도를 남용한 것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기존회사의 채무를 면탈할 의도로 신설회사를 설립한 것인지 여부는 기존회사의 폐업 당시 경영상태나 자산상황, 신설회사의 설립시점, 기존회사에서 신설회사로 유용된 자산의 유무와 그 정도, 기존회사에서 신설회사로 이전된 자산이 있는 경우, 그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었는지 여부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법인격을 부인하기 위하여 사원(주주)의 주관적인 법인격 남용의 의사를 요건으로 하는지 여부에 관하여도 견해가 나뉜다. 판례는 법인격의 형해화와 법인격의 남용을 구별하면서, 특히 법인격 남용의 경우에는 주주와 회사 간 재산의 상호 혼용 및 회계구분 결여, 업무실태 및 기업거래활동의 혼동 등의 객관적 징표뿐만 아니라 사원(주주)에게 법률적용을 회피하거나 채무면탈을 위한 수단으로 회사의 법인격을 남용하려는 주관적 의도를 요한다(대법원 2006.8.25. 선고 2004다26119 판결)고 한다. 그러나 회사의 법인격을 남용하려는 주관적 의사를 요건으로 하면 그 입증의 어려움 때문에 법인격부인론의 효용성을 크게 저하시킬 수 있으므로 회사의 법인격을 남용하려는 주관적 의사는 요구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법인격을 부인하기 위하여 적용요건인 법인격의 형해화와 법인격의 남용 중에서 하나의 요건만 구비하면 되는지 또는 두 요건을 모두 충족하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판례는 하나의 요건만 충족하면 되는 것으로 설시하고 있다(대법원 2008. 9. 11. 선고 2007다90982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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