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굳이 굳이 거지깡통 같은 옷을 입었을까 '
분노가 과거를 반추하게 만드는데 그게 최근 몇 년에 머물던 분노가 이제는 어린 시절로 문득문득 시간여행을 떠난다
샤워할 땐 높은 확률로 분노가 불쑥 튀어나오는데 꼭 분노가 아니더라도 종종 어린 시절의 기억들도 같이 튀어나온다
나는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도, 튀어나오는 기억들이 꽤 먼 과거의 일들이라 조금 의아하기도 하다
상담실에서는 어릴 때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거의 없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딱히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기억도 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저 떠올랐다며 아무 생각 없이 꺼낸 기억의 단편 앞에서, 나는 바보같이 울어버렸다. 왜 우는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정말이지 울거나 감정적으로 그 기억을 처리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번 주에는 '거지 깡통'처럼 생겼던 옷을 구태여 입던 기억이 생각나서 선생님께 이야기를 했다. 꼬꼬마 시절, 사촌 언니가 입던 옷을 종종 물려 입곤 했는데 그중 유독 이상한 옷이 하나 있었다.
정말로 '거지깡통 같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던
나는 자라면서 옷을 사달라고 떼쓰거나 투정 부린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 옷만큼은 정말 입기 싫었다. 지금 다시 그려보거나 만들어보라고 하면 똑같이 재현할 자신이 있을 만큼 선명하다. 이상한 갈색 바탕에 초록, 빨강, 검정 세로 줄무늬가 있는 상의. 입으면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것 같은 옷이었다. 평소 옷에 매우 무던한 타입이었음에도 그 옷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속으로
'괜찮아 옷이 이상한 거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를 반복하며 그 옷을 입었다
이 기억이 떠올랐을 때 그저 의문이 들었다
대체 그 꼬맹이였던 나는 왜 굳이 굳이 그 옷을 입었을까?
그렇게 싫으면 안 입어도 되는데, 다른 옷이 없던 것도 아닌데,
놀림받을걸 걱정하고 스스로도 부끄럽다 느끼면서도 그걸 집어 들고 입을 이유는 뭐람
어린애가 안 입으면 그만이잖아
그냥 순전히 궁금증 같은.
상담 시간에 그 이야기를 꺼내며 처음엔 웃었다
거지깡통 같은 옷이 있었다는 얘기를 꺼내며 웃다가 이야기 도중 갑자기 울어버렸다
이야기 도중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울면서 말했다.
지금 우는 나도, 그 옷을 꾸역꾸역 입던 나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그러다 그 옷을 입었던 이유가 생각이 났다
내가 그 옷을 입지 않으면 부모님이 속상해할까 봐, 헌 옷은 입기 싫다며 투정 부리는 동생처럼,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옷을 속으로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싫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입었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일부러 입어 보이려고 했던 그때의 내가 선명하게 소환되었다
'억울함이구나, 기억회상의 이유가 거기에 있었구나'
요즘 나를 지배하는 '억울함'이라는 감각이, 무의식을 지나 그와 관련된 기억들을 하나둘씩 연결해 오나 보다. 나의 진심과는 무관하게 그들은 아무 말이나 내뱉고 사람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그리고 그런 말들을 그저 이해하고자 덮고 조용히 듣기만 했던 내가 너무 억울해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기억들을 하나씩 소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나는 입 밖으로 기억을 꺼내며, 그저 단순한 의문이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뜨거운 감정이 되어 나오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