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관계와 ‘페이스메이커’ 한국 외교의 시험대

by 김재균ㅣ밀리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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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반도의 숙명, 불안정한 다리 위의 외교

한반도의 역사는 늘 거대한 힘의 충돌 속에서 움직여 왔다. 조선 말기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시작해 한국전쟁을 거쳐 냉전의 최전선이 된 지금까지, 한반도는 세계 정치의 작은 무대가 아니라 동북아 질서를 가르는 전략적 경계선이었다.

오늘날 북-미 관계 역시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북-미의 다리는 언제나 불안정했다. 조금의 신뢰가 쌓이는 듯하면 곧 불신의 파도가 몰려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곤 했다. 2019년 하노이 회담의 실패는 그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정상 간의 만남이라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있었지만, 실무 협상의 부재는 결국 협상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제 다시 묻는다. 북-미 관계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리고 한국은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


2. 전쟁의 그림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북한

현재 북한은 러시아와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며 남쪽으로 향하는 문을 닫고 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선택이 아니라 전략적 계산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북한에게 새로운 실전 경험과 국제적 존재감을 제공했다. 러시아와의 무기 거래, 전쟁 경험 공유는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더욱 자극할 수 있다.

이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북한은 군사에서 외교로 전략적 전환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러-우 전쟁의 종전은 북-미 협상 재개의 전제 조건이자, 한반도 정세 변화의 가장 큰 변수다.

문제는 이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장기화될수록 북한의 대외 전략은 러시아와의 밀착으로 고착화되고, 남북 및 북-미 대화의 공간은 더욱 줄어든다.


3. 트럼프 2기의 ‘피스메이커’ 본능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는 늘 독특했다. 그는 전통적인 외교적 절차를 무시하고 정상 간의 직접 대화를 선호했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보여준 ‘정상 외교’의 파격은 국제정치의 문법을 흔들었다.

트럼프의 강점은 ‘결단력’이다. 그는 다른 지도자들이 망설이는 순간, 협상장을 열고 불가능해 보이는 만남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외교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실무 협상의 부재다. 합의의 세부 조율과 이행 관리라는 밑작업이 부족하다 보니, 합의가 쉽게 무너지고 지속성이 약하다.

트럼프 2기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더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피스메이커’로 자임하며 분쟁의 무대마다 나타났고, 앞으로도 북한 문제를 새로운 외교 무대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 이벤트만으로는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4. 북-미 협상의 구조적 한계

북-미 협상이 실패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도자의 성격 때문만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협상은 여러 난관을 안고 있다.

첫째, 북한의 전략적 계산이다. 북한은 핵을 단순한 협상 카드가 아니라 체제 안전 보장의 최종 수단으로 본다. 따라서 ‘비핵화’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둘째, 미국 내 정치적 요인이다. 미국에서 북한 문제는 언제나 우선순위가 낮다. 중동, 중국, 러시아 문제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북-미 협상은 항상 ‘주변적 현안’으로 밀려난다.

셋째, 실무 협상의 취약성이다. 하노이 회담처럼 정상 외교는 있었지만 실무 합의가 부재했던 사례는 북-미 협상의 구조적 약점을 보여준다. 결국 신뢰를 쌓는 과정은 정상의 결단뿐 아니라, 실무적이고 지속적인 합의 관리가 필요하다.


5. 한국 외교의 자리: ‘페이스메이커’의 의미

이재명 대통령은 한국의 외교적 역할을 ‘페이스메이커’라고 규정했다. 페이스메이커는 마라톤에서 속도를 조절하며 레이스 전체를 안정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전체 흐름을 관리한다.

한국 외교 역시 북-미 관계에서 이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하다. 북한과 미국 모두 한국에게 협상 주도권을 내주려 하지 않는다. 남북 불신은 여전히 깊고, 협상장이 열리면 한국의 중재 역할은 곧 사라진다.

그럼에도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환경 조성이다. 북-미 협상이 열릴 수 있도록 신뢰의 공간을 만들고, 속도를 조절하며, 국제사회에서 한국 외교의 균형자 역할을 확대하는 것이다.


6. 한-중 관계의 전략적 가치

지금 한반도 외교에서 간과하기 쉬운 변수는 중국이다. 미국과의 동맹 강화는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 관리도 중요하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한·중 간에는 일정한 공감대가 존재한다. 중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이 중국과 긴밀히 소통하며 새로운 협상안을 모색할 경우,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한국의 외교적 존재감은 배가될 수 있다.

특히 ‘동결-감축-비핵화’라는 3단계 접근에서, 한국은 동결 단계의 환경을 조성하는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한-미 협력뿐 아니라 한-중 협력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7. 남북의 다리, 다시 신뢰로 세우기

남북 관계는 북-미 관계의 그림자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남북 간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제재 이전에는 경제협력이 남북의 다리 역할을 했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은 남북을 잇는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군사적 신뢰 구축이 더 중요하다. 접경 지역에서의 충돌을 막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야말로 남북 관계의 새로운 출발점이다.

말을 아끼는 것도 전략이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과도한 약속은 신뢰를 해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실현 가능한 조치에 집중하고, 국민에게는 인내를, 정부는 준비를 요구하는 것이다.

8. 실용외교와 유연성의 필요

외교는 직선 경주가 아니다. 우회로도 많고, 때로는 후퇴도 필요하다. 그래서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한국 외교는 북-미 협상이라는 장거리 레이스에서 속도를 조절하고, 때를 기다리며,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실용외교의 생명력은 바로 유연성이다. 진영 대립의 속도를 늦추고, 새로운 협상안을 마련하며, 현실적인 균형을 잡는 것이야말로 한국이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이다.


맺음말: 긴 호흡으로 걸어야 할 길

북-미 관계는 늘 불안정한 다리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 다리가 무너질 때마다 한국은 다시 페이스메이커로 나서야 한다.

한국 외교의 길은 쉽지 않다. 남북 관계의 불신, 북핵 문제의 난제, 미·중 갈등의 압박, 러시아 변수까지 얽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성을 조율하며 긴 호흡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한국 외교의 사명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장거리 레이스에서 페이스메이커가 필요하듯, 한국 외교도 유연함과 인내로 국제 질서 속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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