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격적인 중단, 그리고 역사적 맥락
2025년 9월 1일 새벽, 우리 군의 대북 심리전 라디오 방송 ‘자유의 소리’가 15년 만에 중단됐다. 이 방송은 단순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북한 주민과 군인들에게 한국 사회의 실상과 국제 소식을 전달하며, 닫힌 창문을 열어주는 통로였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재개된 이 방송은 북한이 가장 민감해하는 심리전 수단이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4·27 판문점 선언 이후 대북 확성기 방송이 철거될 때조차도 ‘자유의 소리’만큼은 유지됐다. 그런데 이번 정부는 대북 확성기 중단, 시설물 철거, 전단 살포 자제 요청에 이어 마침내 이 라디오 방송까지 멈추기로 결정했다.
2. 북한 주민에게 닿던 희미한 전파
‘자유의 소리’는 FM과 단파로 송출되며 접경 지역의 북한 주민들과 군인들에게 외부 세계의 창구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체제의 장점과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북한 정권의 실상과 인권 문제,
기상과 생활 정보,
최신 국제 뉴스와 대중가요.
이러한 정보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금지된 지식이자 새로운 인식의 씨앗이었다. 탈북민들은 흔히 “대북 방송을 몰래 듣던 경험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계기였다”고 회고한다. 그만큼 북한 정권은 이를 체제 흔들기로 인식하며 강하게 반발해왔다.
3. 정부의 의도: 긴장 완화와 신뢰 회복
정부는 이번 중단을 단순한 양보가 아니라 전략적 유화 조치로 해석한다.
6월: 민간단체 전단 살포 중단 요청
7월: 국정원 대북 라디오·TV 방송 중단
8월: 대북 확성기 철거
9월: ‘자유의 소리’ 방송 중단
이 일련의 조치는 남북 간 긴장을 낮추고 신뢰 회복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실질적 긴장 완화와 신뢰 회복”을 강조하며, 남북 관계 개선 의지를 분명히 했다.
4. 북한의 무반응, 그리고 불편한 현실
그러나 북한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북한은 일부 대남 소음 방송을 중단하고 확성기 1개를 철거했을 뿐, 본격적인 상응 조치는 취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한국 정부의 정책을 “망상, 개꿈”이라고 조롱했다.
즉, 우리는 유화 조치를 연속적으로 취하고 있지만 북한은 이를 실질적 협상 계기로 활용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양보를 체제 자신감 강화의 신호로 받아들일 위험도 있다.
5. ‘심리전’의 의미와 중단의 파장
심리전은 단순한 선전이 아니다. 닫힌 사회에 진실을 전하는 창구이며, 내부 변화를 자극하는 수단이다. 15년간 이어져 온 방송의 전격 중단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가진다.
북한 주민과 군인에게 닿던 정보의 끈이 끊어졌다.
군 내부적으로는 심리전단의 존재 이유와 임무가 흔들릴 수 있다.
대북 압박 카드 하나가 사라지면서 협상력의 균형이 약화될 수 있다.
특히 북한 체제가 외부 정보 유입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정보는 인식의 균열을 낳고, 균열은 체제 안정성을 흔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방송은 북한이 가장 꺼려온 심리전 수단이었다.
6. 긴장 완화와 억제력 사이의 딜레마
지금 정부는 긴장 완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는 곧 억제력 약화라는 우려로 이어진다. 안보 정책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지나친 강경책은 군사적 충돌을 불러올 수 있다.
지나친 유화책은 상대방의 전략적 오판을 부추길 수 있다.
‘자유의 소리’ 중단은 긴장 완화에 기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북한의 태도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효과는 미미하다. 무엇보다 국민적 공감대 없이 일방적 조치가 이어질 경우, 안보 불안 심리를 키울 가능성도 있다.
7. 앞으로의 과제: 유연성과 현실성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조건부 유연성이 필요하다. 북한의 호응이 없는 상태에서의 일방적 양보는 장기적으로 협킨다. 유화책과 압박책을 병행하며, 북한의 행동에 따라 전략을 조절해야 한다.
둘째, 대체 수단 확보가 중요하다. 라디오 방송 중단으로 생긴 공백을 다른 방식으로 메울 수 있어야 한다. 온라인 정보 유입, 국제사회와의 협력 강화, 탈북민 네트워크 활용 등이 그 방안이다.
셋째, 국민적 설득이 필수다. 심리전 중단은 단순한 군사적 결정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변화다. 따라서 국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공감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의 대북 정책은 곧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다
맺음말: 멈춘 소리, 남겨진 과제
15년간 이어진 ‘자유의 소리’ 방송이 멈췄다. 그러나 라디오의 전파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우리는 긴장 완화와 억제력 사이에서 다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북한의 무반응 속에서 우리의 유화책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정보와 심리전이라는 전략 자산을 포기한 자리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평화는 언제나 치열한 계산 위에서만 유지된다. 정부가 이번 조치를 통해 긴장 완화의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아니면 스스로 협상 카드를 잃어버린 결과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자유의 소리’는 멈췄지만, 남북 관계의 시계는 계속 흐르고 있다. 중요한 건 멈춘 목소리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목소리를 어떻게 낼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