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전주

다시, 전주

by 나자영

지난 휴일에 근무를 해서 얻은 보상 휴가로 훌쩍 전주로 떠났다. 금/토 1박 2일 일정으로 짧게 다녀왔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쉼의 시간을 갖고 와서 성공적인 여행이었다.


11시 용산역 출발 기차라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전주에는 12시 반경 도착해서 일찍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곧바로 교동시래청으로 가서 맛있는 곤드레밥과 뜨끈한 시래깃국으로 이열치열을 하고, 전주 하면 빠질 수 없는 PNB에서 초코파이 하나를 샀다. 역시 기본맛이 최고다. 저녁에 비 소식이 있어서 부랴부랴 움직여서 지난 여행 때 못 갔던 남부시장 청년몰 안에 있는 독립서점 <토닥토닥>을 들렀다. 사장님의 정성이 느껴지는 작은 책방에서 책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소피 카르캥의 <글 쓰는 딸들>을 구입했다.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독립서점에서는 책 한 권을 꼭 사려고 하는데, 이번에 <글 쓰는 딸들>이 나에게로 왔다. 이 책은 지난 창비 북클럽 독서시간에 소개된 책이었는데 읽지는 못했었다. 이렇게나마 읽게 되어서 왠지 비로소 이 책과 연이 닿은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쯤에 한옥마을에 있는 길거리야에 가서 바게트버거를 포장하고, 옆에 편의점에서 여행하면 빠질 수 없는 맥주(무알콜), 그리고 요즘 중독되어 있는 메론킥을 사서 얼른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에서 아늑하게 쉬고 있을 때 밖에서는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이른 저녁부터 밤까지 끝도 없이 비가 내렸는데, 밖에 다니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한옥 숙소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쉬는 시간은 정말이지 너무 낭만 가득이었다. 물론, 숙소에서 나는 낭만과는 먼 TV, a.k.a 바보상자를 시청했다. OCN에서 해리포터 마지막 편을 보고 혼자 울먹이고, 나는 솔로를 지나 미지의 서울까지 갔다. 미지의 서울은 이번 여행의 재발견이었다. 그냥 박보영이 나오는 드라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볼수록 재밌다. 재방송으로 5-6화를 봤는데, 1화부터 정주행이 하고 싶어졌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는 케이블에서 재방송하는 무한도전을 틀어놓고 <글 쓰는 딸들> 초반을 쭉 읽었다. 길거리야 버거와 맥주, 그리고 메론킥 까지 먹어가며 질서 없지만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 서울에서는 절도 있는 삶을 살려고 하지만 여행동안만큼은 좀 풀어지면 뭐 어때,라는 생각으로 나에게 작은 자유를 허락해 줬다. 그렇게 놀고먹다 보니 어느덧 밤 12시.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역시 불면증에는 전주 한옥숙소가 최고다. 언제 해가 떴는지 모르게 숙면을 하고 일어났다. 조식도 맛있게 먹고, 아쉽지만 나의 애정하는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했다. 이 숙소를 애용한 지도 벌써 10년이다. 10주년을 맞아 괜시리 사장님께 작은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서울에서부터 오설록 아이스티를 사 왔다. 작은 쪽지와 함께 선물을 숙소에 두고, 나오는 길에 사장님께 문자를 남겼더니 사장님의 물결~ 담긴 밝은 답장이 왔다. 따뜻한 정이 오고 가는 거, 이런 게 사람 사는 거 아닌가 싶다.


9시쯤 하루를 시작해서 전주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으로 향했다. 수없이 전주를 많이 다녀왔지만, 이곳은 이전에 몰랐었는데, 브런치의 @이순열 작가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작가님의 글 "전주 한옥마을의 또 다른 얼굴"을 읽고 이 장소에 꼭 가고 싶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기회가 되었다. 브런치의 선순환을 새삼 느낀다. 작가님 이 글 읽고 계신가요!


이 기념관은 호남 기독교 역사를 쭉 보여주는데, 미국 선교사님들이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병원과 같은 병원을 짓고, 신흥, 기장과 같은 학교를 설립하며 얼마나 헌신하셨는지 보여준다. 우리나라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주신 그분들께 감사한 시간이었다. 기념관을 다 둘러보고 나오기 전에 한 가지 글귀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글을 읽고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아서, 이번 여행의 목적을 달성한 기분이었다. 오늘 누군가에게도 이 글귀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나침반 바늘은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기 전에 항상 흔들린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을 걱정할 필요 없다. 언젠가는 바른 방향을 가리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아멘을 외치고 싶었던 글이다. 요즘 많이 흔들리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힘들었는데, 그래도 괜찮다고 내 등을 토닥여주는 것만 같다. 직장생활을 계속하든, 공부를 다시 하든,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이 있을 거라고 믿고 지금은 마음껏 흔들려도 되지 않을까.




위로의 시간을 뒤로하고 점심시간이 되어 왱이콩나물국밥 집으로 갔다. 드라마 <당신의 맛>을 촬영했던 장소이기도 해서 이 식당에서 먹음으로써 내가 본 드라마를 완성 시키는 것 같았다. 전주 하면 빠질 수 없는 모주 한잔을 시키고 전주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즐겼다. 식사 후 한옥마을로 가는 길에 잠시 헌책방 <일신서림>을 들러서 또 어떤 책이 나에게 다가올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한 칸씩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조정래 작가의 <인간 연습>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 표지에 있는 글이 너무 와닿아서 바로 집었다.


인간은 기나긴 세월에 걸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시도한다. 그 고단한 반복을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 특유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보다 멋진 말이 있을까. 요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나침반 글귀에 이어서, <인간 연습>을 들고 가는 나는 행복한 여행자다.




마지막 코스로 한옥마을 예담찻집에 자리를 잡아서 경기전 정문을 바라보는 창가에서 오미자에이드 한잔을 마셨다. 마침 경기전 수문장 교대의식이 오후에 있어서, 책을 읽으며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사실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교대의식이지만, 전주에서 그래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예상대로 특별한 건 없었지만 교대의식은 늘 조선시대로 여행하는 기분이라서 소소한 재미가 있다. 영국 근위병 교대식 저리 가라다.


수문장 교대의식이 끝나고 이제 먹을 것만 사가지고 진짜 가야지 했는데, 가는 길에 사당패가 놀이 한마당을 하고 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계엄령 당시에 인사동의 분노 가득한 사당패가 아니라, 잔치를 벌이는 것 같은 사당패여서 마음이 좋았다. 이제 비로소 흥겹게 뛰놀 수 있는 우리들의 일상을 되찾은 것 같아서 잠시 코끝이 찡했다. 기차 시간이 다가와서 이제 진짜 가봐야 해서 두 이모(식스센스에 나왔던 집) 비빔밥와플 하나를 사서 전주역으로 향했다. 1박 2일 짧은 여행이지만, 여행은 여행이었다. 얼른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런 마음도 잠시, 서울에 빼곡한 사람들을 보니 왜 다시 화가 나는지.. 분명 전주에서는 평화로웠는데..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흔들리지만, 이 모든 게 "인간 연습"이 아닐까.


다음에 또 만나자, 전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책의 도시 전주의 도서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