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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삭 Sep 14. 2023

몰도바 알리오나 여사님

여행 X 사랑: 세상을 향해 꽁꽁 언 마음을 녹인 애정과 보살핌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세상을 알아가던 때를 떠올려본다. 마냥 신나기만 했다. 동네 시장을 가는 것만 해도 흥분으로 가득찬 일이었고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다음 외출은 또 언제인지 발을 동동 구르며 보챘다. 


온 세상이 놀이터였다. 

설렘과 흥분만이 가득했던건 사실 엄마라는 울타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가 온갖 겁나고 위험한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줄 것이라는 믿음, 또 낯설고 난해한 것들을 내 눈 높이에 맞는 언어로 차근차근 잘 설명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덕에 걱정도 불안도 없었다. 늘 즐겁기만 했다. 온 세상이 놀이터였다.


커가면서 엄마 손을 잡지 않고 혼자서도 세상을 누빌 수 있게되었다. 스스로 갈 수 있는 곳,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많아졌다. 헌데 도리어 세상은 점점 무서워져만 간다. 사람, 일, 사회, 관계 속에서 상처가 쌓이며 이불 밖으로 나서기가 영 즐겁지 않을 때가 많다. 설렘과 흥분보다는 긴장과 걱정이 앞설 때가 많다. 오늘도 맞서 싸워야할 것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가면서 결연한 투쟁심을 가지게 된다. 온 세상이 전쟁터다.


그 곳엔 아나의 어머니이자 나의 몰도바 엄마이기도 한 알리오나 여사님이 살고 계신다.


세상에 대해, 또 삶에 대해 단단히 토라져 꽁꽁 얼어붙어 있던 내 마음을 녹인 곳은 동유럽의 작은 나라 몰도바 (Moldova) 였다. 몰도바는 나의 소중한 친구 이고르와 아나의 고향이다. 그 곳엔 아나의 어머니이자 나의 몰도바 엄마이기도 한 알리오나 여사님이 살고 계신다. 2019년, 우리는 몰도바의 수도 키시나우 (Chişinău)에 있는 알리오나 여사님 댁에서 함께 여름을 보냈다. 


여사님의 사랑은 언어의 형태를 지니지 않고서도 몰도바에 있는 동안 우리에게 틈없이 전해졌다. 


알리오나 여사님은 우리 부부가 처음 도착해서 인사를 드렸을 때부터 우리를 아들, 딸처럼 꼬옥 안아주며 맞이하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한참 전에 일어나신 여사님께서 아침식사로 몰도바식 팬케잌을 굽는 고소하고 달달한 향기가 주방에서 퍼져나왔다. 사워크림과 잼을 찍어 분주히 입에 넣고 엄지를 척 들면, 여사님께서 환하게 웃어 보이셨다. 여사님은 우리에게 몰도바 구석구석을 보여주고 싶어하셨다. 아나와 이고르가 다녔던 학교, 동네 산책길, 놀이공원들을 둘러보았고 다소 낡은 (말 그대로 그 때 그 시절 그대로여서 살짝 무서웠던) 놀이기구도 함께 탔다. 교외로 나가 여사님의 친구 농장에 들러 집에서 빚은 딸기 보드카를 함께 맛보기도 했다. 여사님은 함께 이곳 저곳을 거닐 때 따스한 손길로 등을 쓰다듬어 주시며 웃어 보이시곤 했다. 여사님의 사랑은 언어의 형태를 지니지 않고서도 몰도바에 있는 동안 우리에게 틈없이 전해졌다. 


몰도바에서 쓰는 루마니아어나 러시아어를 하나도 모르고, 구소련 동유럽지역의 문화도 처음 접해보는 게 많았지만, 알리오나 여사님과 함께 다니다보면 몰도바가 고향처럼 친근하고 구석구석이 좋아졌다. 좋아하면 자꾸 닮은 점을 찾으려한다고들 하는데, 여기저기를 다니며 ‘한국에 비슷한 동네가 있어!’, ‘우리도 이런 음식 좋아하는데, 입맛도 비슷하네!’ ‘한국인들도 이런거 좋아하는데 몰도바 사람들도 똑같네!’ 하며 저절로 공통점을 계속 찾게 되었다. 몰도바를 떠나기 전까지 어디 더 좋아할 구석이 없나 샅샅이 뒤져보려는 사람이 된 듯 했다. 


그렇게 낯선 몰도바 땅에서 세상을 향한 나의 경계심이 풀어헤쳐 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낯선 몰도바 땅에서 세상을 향한 나의 경계심이 풀어헤쳐 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알리오나 여사님의 따스한 애정과 보살핌 덕분에 어느새 언제든 싸울 자세로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다시 호기심 가득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 저곳 손을 뻗게 되었다. 손을 뻗을 때마다 새로운 자극과 설렘, 기쁨이 찾아왔다. 세상이 모르고 있던 위협이나 위험보다, 모르고 있던 즐거움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손을 잡고 다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알리오나 여사님을 만난지도 벌써 4년이 넘었다. 올해도 생일을 맞아 바삐 하루를 보내고 있던 중 몰도바에서 메시지가 왔다. 나의 몰도바 엄마 알리오나 여사님이었다. 영어가 서툰 여사님이 보낸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My Korean son..  Happy 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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