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지만 완벽한 하루
카페에서 나와 몇 걸음 걷지 않은 곳에서 마주한 풍경 역시 좋았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평화롭고 따뜻해 보였다.
대항해시대의 영광은 이제 너무 오래된 이야기일까. 지금의 포르투갈은 서유럽 안에서도 경제적으로는 쉽지 않은 나라다. 팬데믹을 거치고, 모두가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럼에도 포르투갈은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생겨난 문화와 건축물들로 여전히 사랑받는 곳이다.
리스본의 거리를 걷다 보니 왜 이곳이 유럽인들에게 ‘은퇴 후 살고 싶은 나라’로 꼽히는지 알 것 같았다.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 관광객으로 붐비는 장소에서도 이상하게 차분함이 느껴졌다. 소매치기에 대한 긴장도 훨씬 덜해서 가방을 꼭 쥐고 다닐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우기답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도 제법 불어 약한 우산은 계속 뒤집혔다. 우산 쓰기를 포기하고 리스본 대성당을 향해 걸었다.
자동차와 트램이 바로 옆으로 지나다니는 길을 걷다 보니 내가 여행자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노란 트램 하나만으로도 다른 나라에 와 있다는 감각은 충분했으니까.
리스본의 돌길은 비가 오면 유난히 미끄럽다. 언덕의 도시답게 오르내림이 많은 도로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해야 했다.
우기 때의 여행은 불편하다. 길은 미끄럽고, 옷은 젖고, 우산 때문에 시야는 좁아진다. 사진을 찍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비가 종일 내리기보다는 중간중간 그치고 해가 나오는 그 순간만큼은 평소보다 더 좋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이 우기 여행의 보상이라면 보상일 것이다.
내게 리스본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은 리스본 대성당 앞을 지나가는 노란 트램이다. 사진과 실제는 역시 다르다는 걸 이곳에서 다시 느꼈다. 대성당 앞은 여행객과 툭툭이로 늘 붐비고, 좁은 도로에 비까지 내리면 우산 행렬로 시야가 가려진다. 트램과 대성당을 함께 담는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시 리스본에 온다면 10월 초쯤이 좋겠다. 그리고 최소 보름은 머물러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대성당 앞을 지나는 트램을 기다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걸어 코메르시우 광장 Praça do Comércio으로 향했다. 광장에 다다르자 바다처럼 넓은 테주강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저 연기 뭐지? 군밤인가?”
“에이, 설마. 포르투갈에 웬 군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정말 군밤이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길거리 군밤을 이곳에서 만나니 괜히 반가웠다. 포르투갈의 겨울 길거리 간식이 군밤이라는 사실에 묘한 동질감마저 들었다.
내가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은 주로 음악과 향기, 그리고 물건이다. 여행 중에 듣던 음악은 시간이 지나도 그곳의 공기를 다시 불러오고, 향기는 여행을 시작하며 새로 산 향수나 그 도시의 향과 닮은 향수로 남긴다. 일본 여행을 하면서 궁금했던 향수를 면세점에서 사서 여행 내내 뿌리고 다녔고, 그리스 여행에서는 코린토스 거리에서 맡았던 오렌지꽃 향이 너무 좋았는데, 그걸 아테네 공항 면세점에서 만났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 여행에선 옷을 하나 샀다. 저렴하지만, 입는 동안 그 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작은 물건들이 여행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돌아온 뒤에도 음악이나 향을 마주할 때 문득 그날을 다시 내 앞에 데려온다. 참 멋진 일이다.
자라에서 옷을 구입하고 나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입구에는 우산을 파는 아저씨가 서 있었고, 잠시 후 우산을 든 다른 여인이 다가와 큰 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다.
“여긴 내 구역인데, 왜 여기서 우산을 파는 거야.”
그런 말처럼 들렸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금방 잦아들 것 같지 않아 점심을 먹으러 향했다. 매장에서 호시우 광장 Praça do Rossio을 지나 식당까지 가는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종이가방은 흠뻑 젖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광장에서는 크리스마스 마켓 준비가 한창이었다.
점심시간을 한참 지난 덕분에 식당에는 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젖은 외투의 물기를 털고, 젖어버린 종이가방을 정리하며 잠시 부산을 떨었다. 리스본의 대표적인 해산물 요리인 정어리와 문어 요리, 그리고 스테이크를 함께 주문했다.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해 나눠 먹는 방식이 여러모로 편하다.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나오니 화창한 하늘이 반겨준다. 정말 스펙터클 한 하루다. 다시 코메르시우광장 쪽으로 이동하면서 나타를 맛봤다. 배가 불러도 나타는 지나칠 수 없다. 이건 의무다!
Fábrica da Nata에서는 줄 없이 바로 주문했고, 달콤한 크림이 든 붕어빵 같은 인상이었다. 이어서 Manteigaria에서는 매장 밖으로 10분 정도 줄을 섰다. 단맛이 가장 강했다.
리스본에서 세 곳의 나타를 맛봤지만, 내 입맛에는 벨렝의 파스텔 드 나타가 최고였다.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식감과 균형이 가장 좋았다. 벨렝의 나타를 가장 나중에 먹었다면 평가가 달라졌을까. 최고의 나타를 처음에 맛보고 나니, 이후에는 감흥이 조금 덜해졌다. 그러니 나타를 위해서라도 벨렝 지구는 꼭 가야 한다.
맑은 하늘 아래서 보는 코메르시우 광장은 또 다른 장소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 내린 비로 광장 곳곳에 고인 물이 광장 주변 풍경을 환상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물에 반영된 풍경을 담아보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곧바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우기였기에 가능한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정해진 일정이었지만, 돌아보면 내게는 더없이 완벽한 하루였다.
비가 내린 후에는 땅에서도 하늘이 열린다. 물웅덩이에 비치는 하늘과 건물은 실제로 보는 것보다 신비롭게 보였다. 샘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에게 거울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에 비친 리스본의 풍경에 빠져 한동안 땅만 보고 걸었다. 리스본에 다녀온 후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그리움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아마도 그 순간부터 물에 비친 리스본을 보고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