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당일, 우리는 꽤 괜찮은 상태였다.
국제선을 연결하는 국내선을 타려고 공항에 모였는데, 친구가 캐리어 바퀴가 망가졌다며 걱정했다.
'아니, 그걸 이제 알았다고? 그러게 좋은 거 샀어야지.'
10년 넘게 유럽 돌길도 끄떡없이 버텨온 내 캐리어를 보며 은근히 뿌듯해했다.
국제선 연결 편인 국내선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해 환승 구역으로 들어가니 시간적 여유도 충분했다.
면세점을 구경하며 여유롭게 커피도 마셨다.
출발 전 우리의 모습은 일찍 나오느라 잠을 설쳤음에도 말끔한 여행자 그 자체였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설레는 표정으로 셀피도 찍고, "드디어 출발이다!" 하며 들뜬 에너지로 가득했다.
승무원이 아닌 가상 인간이 알려주는 기내 안전 영상을 보며, 각자 15시간의 비행을 견딜 준비를 했다.평상시엔 사용할 일이 없던 저가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은 긴 시간 동안 가장 기특한 준비물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15시간 30분 후.
리스본 공항에 도착한 우리의 모습은...
머리는 산발, 얼굴은 부어있고, 옷은 구겨져 있었다. 그래도 신났다. 여기는 리스본이니까!
짐을 찾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어? 어?"
긴 비행시간 때문에 피곤해서 캐리어가 무겁게 느껴지는 건가? 대구공항에서 코앞에 있는 항공사 카운터까지만 이동할 때는 몰랐는데, 리스본 공항에서의 이동거리가 길어서 그런 건가? 하지만 아니었다.
바퀴가 제대로 안 굴러간다. 정확히는 한쪽 바퀴가 마모돼서 끌려가는 상태였다.유럽 중세 돌길이라는 험난한 전장을 무사히 통과한 그 캐리어가, 공교롭게도 리스본 공항의 매끈한 바닥에서 은퇴를 결심하다니!
순간 아침에 내가 친구 캐리어 보며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게 좋은 거 샀어야지...'
대항해시대 게임에서 적대국 항구에 입항했다가 소지금을 벌금으로 압수당하듯, 나의 영혼이 실시간으로 차압당하는 기분이었다.
반쯤 고장 난 캐리어를 끌면서 나는 원망했다.
'너... 하필 포르투갈에서 이러기야? 내가 여길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여기서 이 꼴이야?'
숙소까지 가야 하는데, 15시간이 넘는 시간을 꽁꽁 묶인 채 견딘 나의 몸은 잘 구르지 않는 캐리어를 끌고 가기엔 숙소는커녕 리스본 공항을 빠져나오는 것도 힘들었다.캐리어를 굴리는 게 아니라 질질 끄는 수준이었다.
내 캐리어보다 더 중요한 일행의 일정을 책임지는 역할 맡고 있었던 나는 볼트를 불러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 내내 생각했다.
'이걸 여행하는 동안 끌고 다녀야 하나?'
면세점에서 새 캐리어를 사서 추가 수하물 요금까지 들인 친구의 새 캐리어가 너무 멋져 보였다.
숙소에 도착해서야 겨우 짐을 내려놓았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특별했다. 지금까지 숱하게 다닌 여행의 마음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리스본의 공기, 불빛, 현지인들의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공항에서부터 사진을 찍으면서 나왔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캐리어 때문에 내 두 손이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하, 사진..."
이렇게 내 포르투갈 여행은 시작되었다.
여행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게임 속에서도 여러 어려움을 겪지만, 게임은 세이브할 수도 다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현실은 게임에서의 리스타트는 없지만, 함께 한 친구들과의 끈끈한 우정과 추억을 남긴다.그래서 더 재미있다.
*에필로그
친구는 위탁 수하물 2개를 찾아 능숙하게 헌 캐리어의 내용물을 새것으로 이주시켰다.
문제는 헌 캐리어였다. 버려야 하는데, 부피가 소형 냉장고급이라 아무 쓰레기통에 쑤셔 넣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공항을 청소하시는 분께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기요, 이거 버릴 건데 어디다 버려야 할까요?"
그분이 대답했다.
"내가 가질게요. 고마워요."
"어... 근데 이거 바퀴가 부서졌어요."
"노 프라블럼! 땡큐!"
우리도 땡큐였다.
서로가 아름다운 윈윈.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국제 협력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