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올라서는 것만으로도 조안 페레로가 출항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하는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정말 이곳이 현실일까?'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떠나는 오늘의 목적지는 벨렝지구.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게임에서처럼 이 여행도 내 스킬을 레벨업시킬 것이다. 통솔력, 항해술, 지식...아직 모르는 수많은 능력들이.
하지만 진짜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나는 이 여행에서 과연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맑은 하늘을 보며 아침을 먹고 나왔건만, 가는 길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버스에 몸을 싣고 가는 동안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문제는 버스가 정류장을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 구글맵을 보다 한눈을 판 사이, 환승해야 할 정류장을 놓쳤다.
하차 벨을 누르고 내렸을 때 비는 제법 내리고 있었다. 웬만한 비는 우산 없이 다니는 리스본 사람들도 이때는 처마 아래로 피하거나 우산을 펼쳤다. 다행히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다른 버스를 탈 수 있었고, 마침 산타 아폴로니아 역이 가까워 잠시 비를 피했다.
역 안의 전광판 앞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찾고 있고, 나도 내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도착이 아니라 가는 길이 아닐까?
게임에서 스킬은 레벨업도 되지만 때론 떨어지기도 한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이 여행에서도 분명 마이너스가 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이 끝이 아니다. 그 경험들이 결국 나를 더 크게 만들 테니까. 순간의 실패에 낙심하지 말자.
역을 빠져나오니 비가 그쳤다. 저 멀리 파란 하늘이 보인다. 버스로 한참을 더 가는 동안 구름도 서서히 걷혔고, 해가 나왔다. 가는 길에서 만난 것들은 예상 밖의 아름다움이었다. 리스본의 파스텔 톤 벽들과 유독 눈에 띄는 노란색들. 원래 노란색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리스본에서는 그 색에 자꾸만 눈이 간다. 파스텔 색이란 것이 참 묘해서, 밝으면서도 은은하고, 튀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포르투갈의 강한 햇빛은 색을 바래게 한다. 지중해성 기후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밝은 파스텔 색들은 빛을 반사시키고 열을 견뎌낸다. 바닷바람은 진한 색보다 연한 색을 더 너그럽게 벗겨낸다. 자연이 선택한 색이다.
당시 저렴하고 흔한 석회를 이용한 회벽 마감재에 비싼 광물 안료를 소량 섞어 파스텔톤을 만들었다는 더 현실적인 이야기도 있다. 절약과 필요가 만든 색인 것이다. 그것이 세월을 거쳐 아름다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타고난 본래 색은 무엇일까. 태어날 때 품었던 순수한 색은 얼마나 진했을까.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그 시절, 아무것도 잃지 않았던 그 시절의 색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고, 바닷바람처럼 무언가가 우리의 색을 벗겨낸다. 돌아가고 싶었던 날들, 후회했던 순간들,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덧칠되고, 바래진다.
학창 시절엔 손꼽아 기다리는 생일은 조금 억울한 날이었다. 친구들은 학기 중 생일을 맞으며 교실에서 축하받지만, 나는 방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1999년, 친구들과 함께한 유럽여행의 중반쯤에 생일을 맞았다. 피로와 긴장이 누적되어 예민해지던 시기였다. 그런데 친구들이 "오늘이 생일이잖아." 하며 노천카페로 날 이끌었다. 조각케익 하나, 어쩌면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 그 작은 케익은 억울했던 지난날들을 한순간에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낭만과 우정이 가득했던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생일은 항상 여행 중에 맞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축하받으면서 살고 싶다고.
리스본의 벽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바래져서가 아니라, 그 벽들이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 색이 순수했다면, 지금 색은 소박하다. 그 속에는 견딘 날들이, 사랑받은 순간들이, 누군가를 위하는 것들이 모두 담겨 있을 것이다.
비엔나의 그 노천카페에서 받았던 조각케익처럼,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게, 더 부드럽게 빛난다. 크고 온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우리의 색은 우리가 살아냈다는 증거이고, 누군가와 함께였다는 증거이고, 견디며 만들어낸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어느새 발견기념비를 지나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에필로그
환승할 정류장을 놓친 우리는 다음 정류장에서 허둥지둥 내렸다.
비가 꽤 쏟아지고 있었고 우산도 없었기 때문에 몸의 반 정도만 겨우 피할 수 있는 처마 아래로 들어갔다. 거기서 구글맵을 검색했다.
다행히 근처에 다른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이 있었다.
"근처에 있네! 가자!"
기세 좋게 출발한 우리였지만, 몇 걸음도 못 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 잠깐. 이쪽인데?"
"아니야, 지도 보니까 이쪽으로 가라고 했는데?"
우리는 마치 길을 잃은 GPS처럼 반대 방향을 향했다. 왔다갔다왔다갔다.
서로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며 확인한 순간, 소름 끼치는 진실이 드러났다.
"우리... 다른 정류장을 본 거였어?"
비를 피하여 서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계속 봤다면 코미디 쇼를 본 것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하늘은 나름의 자비를 베풀었는지 비가 점점 가늘어졌다.
우왕좌왕하는 동안 비가 점점 가늘어졌고, 역 앞쪽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