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중년을 건너가는 중입니다 (4)
"너는 왜 달려?"
<달려라 하니 - 나쁜 계집애>에서 나애리가 하니에게 던진 한마디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왜 살지?"
중년의 나이에 사춘기 소년처럼 요즘 내내 나를 붙잡고 있던 질문이 뜻하지 않은 만화 영화 속 대사 때문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냥 살면 안 되는 걸까?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으로는 안 되는 걸까? 이렇게 말하면 <달려라 하니 - 나쁜 계집애>에 나오는 '나비'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재미없게 사네."
그럼, 난 이렇게 말하지 뭐.
"그래~ 나 재미없게 산다. 난 이렇게 사는 게 재미있어. 넌 너대로 난 나대로 살자."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해도 혼자서 다시 끙끙거릴 것 같다.
"나는 왜 살지?"
이번 주말에 아이들과 <달려라 하니 - 나쁜 계집애>를 OTT로 함께 봤다.
<달려라 하니>는 어린 시절에 즐겨봤던 만화영화였는데 내가 하니를 봤던 나이와 지금 우리 아이들의 나이가 비슷한 것 같다. 세월과 세대를 뛰어넘어 같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처음에는 그저 '추억'에 잠겨서 영화를 봤다. 아이들에게도 영화를 보면서 "엄마, 아빠가 어렸을 때는 말이야. 이 만화가 말이지~" 하면서 '라떼'를 연발했다.
쇼츠와 자극적인 영상에 익숙한 아이들도 어쩐 일인지 지루해하지 않고 끝까지 같이 영화를 봤다.
<달려라 하니 - 나쁜 계집애>는 내가 어려서 봤던 만화를 그대로 재현한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하니와 나애리가 40년을 뛰어넘어 다시 한번 대결을 펼치게 될 줄 알았는데 영화는 새로운 사건과 갈등으로 전개됐다.
나애리와 하니가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살짝 눈물을 흘렸다. 울고 있는 내 모습을 아이들에게 들켜버려서 조금 민망했다.
<달려라 하니 - 나쁜 계집애>는 마치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느낌이었다.
"너는 왜 살아? 너의 소실점은 어디야?"
"달리기가 너의 삶이라고 했을 때, 너는 하니와 나애리 중 누구 스타일로 뛰고 있어?"
"네 인생에도 나애리 같은 사람이 있어? 너는 너의 나애리와 화해할 수 있어?"
답은.... 천천히 나 자신과 대화하며 구해봐야겠다.
갑자기, god의 <길>이라는 노래가 듣고 싶다.
나의 청춘의 시절에는 삶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그럴듯한 대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서 하나, 둘 포기하는 것이 늘어나고 새롭게 집중해야 할 것이 생기면서 청춘의 이유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중년의 나는 지금 회사에서의 업무와 가장으로서의 삶과 브런치를 통한 글쓰기로 새롭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청춘의 시절처럼 거창한 의미를 만들 생각은 없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가 의미를 찾게 되면 좋은 거고 열심히 살면서 도착한 길에 아무것도 없어도 열심히 살았으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의미보다는 가치에 충실하려고 노력 중이다.
삶의 의미와 목표가 뚜렷했던 시절에는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나를 희생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매 순간 행복하고 싶다. 살아보니 꼭 웃고, 유쾌해야지만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그 순간도 결국 다 행복이더라.
김상용 시인이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마지막 구절이 떠오른다.
"왜 사냐건 웃지요"
나도 내 마음에 남향으로 창을 내고 세상과 타인을 향해 웃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