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사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이혼 소송 중이라는 대답을 듣고 뒤로 한걸음 물러서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보통 사유를 물어온다. 혹은 어떤 경위를 통해 벌어졌는지 궁금해한다.
이지경에 와서야 내가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그동안 원인이 결과를 만든다는 방식의 인과관계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 중 어느 쪽에도 우선순위는 없다. 단지 시간 상 원인이 먼저 벌어졌을 뿐 결과 역시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최대한 단순히 말해 나는 그 사람과의 이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을 만난 것도, 서로 행복했던 시기를 지나 서먹해지기 시작한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소송이 시작되고 이혼까지 밀려온 것도 하나의 큰 덩어리였다. 단지 물리법칙 때문에 시간 순서대로 겪어갈 뿐.
이유가 필요할까. 만약 그저 벌어질 일이었기에 겪었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통제력 없게 들릴까. 만약 먼저 벌어지는 일들만 가지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면 세상에 이혼이 왜 생길까. 이혼할 사람과 누가 결혼하고 같이 살까.
왜 이혼했냐고? 소송이 벌어졌으니까. 그 사람이 같이 안 산다고 했으니까. 얘기를 잘해보지 그랬냐고? 안 해봤을까? 직접 찾아가 보고 문자도 보내보고 할 수 있는 건 해보지 않았을까?
만약 이혼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면 이때다 싶어 이혼했겠지. 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어나갈 뿐이었다.
끝에 가서 하는 소리로 자기는 나름대로 계속 눈치를 줬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 종이에 또박또박 써서 보여주거나 귓구멍에 대고 해야 할 말을 한 번이라도 명확히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본인이 원하는 결과로 은연중에 살금살금 다가가고 있었을 뿐이다.
이유가 필요한가. 만들어내면 된다. 내가 받은 이혼서류에는 수십 가지 이유가 써져 있었다. 하다못해 내가 과자봉지 안 버린 이야기까지 있었다. 내가 화낸 적이 있으니 다혈질이란다. 내게 한때는 도움을 줬으나 뒤로 부당 이익을 취하던 사람과 거래를 끊자 이익에 따라 계산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라 믿을 수 없다고 적혀있었다.
만약 내가 술자리를 좋아하고 이성이 주변에 많은 사람이었다면 서류는 더 끔찍하게 적혀있었겠지.
사유는 단 하나다.
당신은 당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조차 믿지 못했을 뿐이다. 다른 이유가 어찌 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