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온 Oct 04. 2023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면

사람일 모르니까요

한참 연애하고 헤어지던 시절 으레 겪던 것처럼 이혼을 겪다 보면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이 기울곤 한다.


처음 이혼을 겪을 땐 세상이 끝났고 이제 나 같은 사람은 교통사고로 박살 나버린 자동차처럼 혼자 쓸쓸히 폐차장 같은 데서 썩어갈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애초에 살면서 이성을 만나보고 결혼까지 가본 사람인데 비슷한 일 또 안 벌어질까.


처음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던 날 혼란스럽고 비통했던 와중에 동년배로 보였던 변호사 중 한 분은 내게 본인도 사실 이혼을 겪고 혼자 딸을 키우고 있는데 이혼 이후로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연애를 하고 있다며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 그 와중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지나면서 조금씩 이해가 간다.


냉정하게 얘기해 이혼 소송에 들어간 순간부터 가정이 파탄 난 것이기 때문에 서로 이혼에 대한 의사가 명확해졌다면 다른 이성을 만나는 것이 딱히 문제 되지 않는다. 이때다 싶어 냅다 연애상대를 찾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말은 안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많겠지.


법적으로 문제 되는 것도 아니고 윤리에 맞니 아니니는 동네마다 다르니 누가 뭘 하고 다니든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다. 설령 이젠 아내가 그러고 돌아다니고 있다 해도 뭐 어쩌겠나, 멀쩡히 겉으로 잘 살고 있는 사람들도 숨어서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고 돌아다닌다는데.


결국은 본인 선택에 대한 문제인데 옳은 선택이 있는지 잘못된 선택이 있는지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어느 과정은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며 이를 통해 결국은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성관계란 참 웃기다.


스스로 완전하다면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겠지만 사람은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가진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구멍을 채워줄 누군가를 붙들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 사랑일 수도 있겠지. 정의는 각자가 내리는 거니까. 이름표는 본인이 알아서 붙이면 되겠다.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내 소식을 듣고 경험자로서의 조언을 해주며 감정적으로 터져 나오던 내 말들을 능숙하게 정리해 줬으며 그 힘든 시간 속에서 혼자 내팽개쳐있다는 느낌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 줬다. 어쩌면 이 사람이랑 다시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도 가져보곤 했었다.


어느 순간부터일까. 관심이 조금 지나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쯤 그녀는 티가 날듯 말 듯 내게 어떤 행동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녀의 이상적인 배우자가 해줄 법한 루틴이었겠지. 하루를 묻고 조용히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친구니까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아니. 친구는 만드는 게 아니야. 만들어지는 거야. 네가 원하는 건 친구가 아니라 네가 가지지 못했던 반쪽이야. 아이에게 있었으면 해왔던 좋은 아빠고.


나는 그 사람이 아니야.


자기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그냥 친구로 남아주면 된다고 당황했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래, 백번 양보해 나 혼자 오해한 걸 수도 있다. 그저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종종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됐던 그게 나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필요해서 나, 남편이 필요해서 나, 아빠가 필요해서 나, 이미 지난 몇 년의 시간을 통해 그 종착역을 봐오지 않았던가.


내가 그저 나인채로, 내가 무엇을 가졌거나 무언가를 해냈고 해내는 중이고가 아닌 그저 내가 나인채로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한번 데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상대를 그렇게 볼 수 있을 때, 그저 그 사람을 그 사람인채로, 아무 이유도 없이 조건이나 상황과는 상관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일 때, 그때는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을 지금도 종종 한다. 늦은 후회일지라도.


흠이 있으면 세일을 조금 해서라도 제때 팔아야 된다는 게 우리 고모가 좋아하는 냉소적 표현인데 반대로 이미 한번 해봤기 때문에, 심지어 아이까지 있기 때문에 아쉬울 것도 없고 급할 것도 없다. 덤으로 한 번 더 받은 기회이기에 쓰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염가에 내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도 있었다.


내가 이혼 중인 걸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다가와 자기감정을 전했고 내게 아이가 있으며 아이와 같이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점점 더 다가왔다.


진심인가 싶었는데 진심이긴 했다. 다만 이미 본인 인생계획을 타이트하게 짜놓은 사람이며 내게 호감을 보였던 이유는 냉정하게 말해 내가 무던한 사람으로 보였고, 사실은 무기력했기 때문이었지만, 한번 비싼 수업을 치른 덕분에 보통 남자들보단 상대의 기분을 세심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를 위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요구에 나와 내 아이의 삶까지 걸 수는 없었다. 그래, 하다못해 나는 뒷전이더라도 이 사람이라면 내 아이는 정서적으로 행복할 수 있겠다 싶었으면 감당할 수 있었다. 아빠로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그런 마음으로 지금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도 견딜 수 있으니까. 근데 어느 쪽도 아니라면 애초에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을 하나 짚자면 이혼이 끝은 아니라는 거, 이성관계 그 자체는 어떻게든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거.


다만 이전의 답습일지 새로운 한 걸음일지는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 그걸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가. 난 지독히도 운명론자에 가깝지만 태도라는 건 개인이 정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어떻게 끝맺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일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말로 풀어내기는 어려운 느낌이지만 나는 좋은 아빠이고 싶다. 아이가 살아가면서 힘들 때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침반이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 부성애나 부모로서의 책임감 이전에 가장 가까이서 먼저 걸어 나가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을 보여주고 싶다. 이건 아마 개인적인 욕심에 가깝지 않을까.


아이가 훗날 나를 기억할 때 눈앞의 자기 삶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채 막연한 기대를 안고 살던 모습보다는 부족함도 과함도 양만큼만 담아 가볍게 걸어가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롭지.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빈집에서 혼자 눈을 뜨면 누가 안 외롭겠나. 좋아했던 마음만큼 미워하게 된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견디기가 쉽나. 옆에서 조금이라도 누가 편들어주면 마음이 왜 안 기울겠나. 그렇잖아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얼마나 옆에서 꼬드겨요. 얼마나 허전하겠어요.


이 지경까지 온 거야 어쩔 수 없는데 더 추해지진 말아야지. 그래. 두 번도 좋고 열 번도 좋고 사람이 살면서 실수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치자. 몇 번 더 할 수도 있지만 덜 할 수도 있지 않나. 솔직히 그 수준에서 노력의 양만 늘려봐야 다른 형태로 비슷한 수준의 결과물만 나온다는 생각을 한다.  


신중하게 몸을 사려야 하나. 아니. 기회가 몇 번이나 더 있을 줄 알고 몸을 사릴까.


어차피 한번 세게 데인 부분은 알아서 조심하게 돼있다. 그저 최선을 다하고 어차피 이혼까지 겪어본 마당에 새로운 만남이 잘 되고 못 되는 게 무서운 일인가. 움츠러들면 내가 가진 어둠도 안으로 숨어버린다.


솔직히 조금 잔인할 수도 있지만 이혼을 겪는 동안 나도 잊고 있던 내 안의 어두운 면들이 밖으로 모두 드러난 덕에 옛날부터 뒤틀려있던 부분들을 상당히 찾아내고 뜯어낼 수 있었다. 갈무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뜬금없이 생겨나던 이성들과의 갈등을 겪으며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한 찌꺼기들까지 쥐어내졌다.


이성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이성과 부딪히는 순간에만 알 수 있다. 배우자는 이성들 중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사람인만큼 나와 상대가 가진 불완전함들이 첨예하게 부딪힌다. 다르게 얘기하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만나는 사람과는 절대 경험하지 못하는, 스스로는 혼자 알 수 없는 부분들을 자신의 배우자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결혼을 몇 번 더 하기는 좀 힘들 것 같고, 그나마 앞으로 내게 몇 번의 만남이나마 남아있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였으면, 그렇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싶다. 만남을 소중히 알면서도 물러나야 할 때 역시 아는 사람이 돼있었으면 싶다.


결국 마지막 날에 혼자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결혼도 해봤고 아이도 있다. 비록 끝이 안 좋았지만 난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했고 적어도 내가 노력한 만큼은 남았다고 생각한다.


그래.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고 남은 만남들이라고 찾아오는 족족이 개패면 또 어떠리. 그땐 진짜 팔자려니 해야겠지.


진짜 어느 소설에나 나올법한 사람처럼 세 번 이혼하고 결국 머리를 밀어버린 스님 한 분을 알고 있다. 적당히 육식도 즐기시며 산속에서 잘 지내신다. 다 살아진다.


그래도 머리는 안 밀어야지.

이전 19화 작은 촉감이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